존 스터지스: 독수리 착륙하다 (1976)
https://www.imdb.com/title/tt0074452/

오리지널 스코어: 랄로 쉬프린 Lalo Schifrin
도널드 서덜랜드가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접하고 인스타그램에서 인터뷰 영상을 보는데 '하나님이 다른 도널드를 잘못 데려가셨다'는 댓글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트럼프 암살 시도 사건을 보고서 그 댓글이 떠올라서 오류를 수정하려고 했던 건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도널드 서덜랜드의 출연작 중에 "독수리 착륙하다"라는 영화가 있었죠. 독일군이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영국 수상 처칠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이야기죠. 마이클 케인과 로버트 듀발이 독일군으로 나오고 도널드 서덜랜드는 그들과 협력하는 아일랜드인으로 출연을 하고 있죠. 도널드 서덜랜드와 제니 애거터가 등장을 할 때 흐르던 음악의 경쾌함이 무척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군이 나오는 영화에는 왠지 하나 넣어줘야 할 거 같은 행진곡도 흥겹습니다.



제니 애거터
도널드 서덜랜드, 제니 애거터
제니 애거터, 도널드 서덜랜드
제니 애거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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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로지: 콘크리트 정글 / 크리미널 The Criminal (1960)
https://www.imdb.com/title/tt0053740/

90년대 EBS 일요일 낮 오후 시간에 조셉 로지의 "콘크리트 정글"을 방영해준 적이 있었어요. 오프닝에 나오는 클레오 레인의 음악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엔드 크레딧 올라올 때 노래 제목을 노트에 메모했죠. 클레오 레인 음반을 사려고 보니깐 그 노래가 도무지 없는 거예요. 왜 없지 했는데 영화 크레딧에는 Prison Ballad라고 되어 있긴 했는데 원래 노래 제목은 Thieving Boy 였어요. 허무하죠? 이제는 유튜브에서 실컷 들을 수 있답니다.;;



All my sadness
All my joy
Came from loving a thieving boy
All my sadness
All my joy
Came from loving a thieving boy
Came from holding
Came from toying
Came from loving
Came from joying

Swift his hand
And deft, my love
Could steal the down
From off a dove

They imprisoned him
For it is true
That if you steal
They come for you
So watch you ladies
While I wait
Right outside
The prison g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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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바에즈의 다큐멘터리 영화 "존 바에즈: 아이 엠 어 노이즈" 예고편을 봤어요.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또 한편으로는 동생인 미미 파리냐가 여태 살아 있었다면 같이 무대에 서는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더군요. 미미 파리냐가 일찍 세상을 떴죠. 존 바에즈가 미미 파리냐를 모델로 쓴 곡이 있어요. "스위트 갤러해드"라는 곡이에요. 미미 파리냐는 어린 나이에 소설가이자 뮤지션인 리차드 파리냐와 결혼을 하는데 사고로 남편을 잃게 되죠. 오랜 시간 깊은 슬픔에 빠져 있고 그녀에게 끈질기게 구애하는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서 다시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들의 앞길에 축복이 있기를 기원하는 곡이죠. 동생을 생각해서 이런 멋진 곡을 쓰다니 무척 감동적입니다.



"Viva Mi Patria Bolivia"
존 바에즈와 미미 파리냐가 싱싱 교도소에서 함께 공연하는 영상입니다. 싱싱 교도소라는 이름은 예전에 영화 "칼리토"에서 처음 들었는데 알 파치노가 자신이 싱싱 교도소에 몇 년 있었다는 대사를 하는 장면이 있죠. 교도소 이름이 싱싱이라니 재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싱싱 교도소에서 공연하는 B.B. 킹이나 보이스 오브 이스트 할렘(The Voices of East Harlem)의 영상도 유튜브에 있던데 정말 멋지더군요. 

 

존 바에즈, 폴린, 미미
폴린, 미미, 존 바에즈
미미 파리냐, 존 바에즈, 비틀즈 조지 해리슨 (1966년 캔들스틱 파크 백스테이지)
미미 파리냐, 존 바에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어머니 조안 브릿지와 함께 한 미미 파리냐, 밥 딜런, 존 바에즈


존 바에즈, 미미 파리냐의 "Morning, Morning". 원곡은 록밴드 The Fugs의 곡입니다.



리차드 & 미미 파리냐의 "A Swallow Song"입니다.
Los bilbilicos라는 전통음악에 가사를 붙인 곡입니다.

 

고등학교 때 구입했던 음반인데 무척 오랜만에 꺼내보게 되네요. 브레드 앤 로지스(Bread & Roses) 공연실황 음반이에요. 브레드 앤 로지스는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기회에서 소외된 병원, 양로 시설, 장애인 시설의 사람들에게 라이브 음악의 즐거움을 전하고자 미미 파리냐에 의해 설립된 단체입니다. 잭슨 브라운, 제시 콜린 영, 말비나 레이놀즈, 피트 시거, 리치 헤이븐스, 버피 세인트 마리 등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실황 음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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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 페라라: 피어 시티 Fear City (1984)
https://www.imdb.com/title/tt0087247/

미아 고스가 나오는 "맥신 MaXXXine" 예고편을 보다가 "피어 시티"가 생각나더군요. 80년대와 연쇄살인마라는 소소한 공통 키워드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톰 베린저가 트라우마가 있는 전직 복서 출신으로 등장을 하죠. 국내에는 "피어 시티"라는 제목으로 비디오 출시되기도 했고 다른 제목을 달고 나오기도 했는데 신기한 건 서로 편집이 살짝 다르더라고요. '아니... 있던 장면 어디 갔지?' 당황하면서 봤던 일이 있었네요. 이 영화를 기억하고 있는 건 엔드 크레딧에 나오는 데이비드 요한슨의 노래때문이기도 합니다. 엔드 크레딧만 몇 번씩 돌려서 보기도 했죠.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들어보니 역시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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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전기영화가 제작중이라는 얘긴 들었는데 피트 시거 역할을
에드워드 노튼이 맡은 건 촬영 사진을 보고 처음 알았네요. 피트 시거는
반미활동조사위원회(HUAC) 청문회에서 정치적 활동 연관성에 대한
증언을 거부하면서 기소가 됩니다. 부인인 토시 시거와 함께 법원에 출두
하는 장면을 재현한 촬영현장 사진인 듯 하네요.


피트 시거의 청문회 발언
"저는 제가 어디서 노래를 불렀는지, 누가 제 노래를 불렀는지, 저와 함께 노래를
불렀던 다른 사람들과 제가 아는 사람들에 대해 강압에 의해 논의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저는 조국을 매우 사랑하며, 제가 노래한 장소와 제가 아는 사람들로 인해서, 그리고
저의 의견 중 일부가 종교적이든 철학적이든 또는 채식주의자라는 이유로 인해서 저를
덜 미국인으로 만든다는 암시에 매우 분개합니다. 저는 제 노래에 대해 말하겠지만 누가
작곡했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고, 제 노래에 대해 말하겠지만 누가 들었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제 소속 단체, 철학적 또는 종교적 신념, 정치적 신념, 저의 선거 투표 방식 또는
사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미국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매우 부적절한 질문이며, 특히 이런 강압적인 상황에서 받는 질문은 더욱 그렇습니다.
제 삶에 대해 듣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평생 동안 음모적인 성격의 어떤 일도 한 적이 없으며, 제 의견이 위원님이나
윌리스 씨, 셰러 씨와 다르다고 해서 제가 다른 누구보다 덜 미국인이라는 의미로 이 위원회에
불려온 것에 대해 매우 깊이 분개합니다. 저는 조국을 매우 깊이 사랑합니다."


1961년 4월 4일 밴조를 메고 뉴욕 연방법원에 출두한 피트 시거. 부인 토시 시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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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로시: 스모그 Smog (1962)
https://www.imdb.com/title/tt0056502/
음악: 피에로 우밀리아니, 보컬: 헬렌 메릴

 

Helen Merrill

*Helen Merrill in Italy 앨범에 수록된 피에로 우밀리아니의 글을 옮긴 것임.
헬렌 메릴에 대해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그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나. 그녀의 목소리는 관능적이고 스타일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최고의 노래와 최고의 재즈 뮤지션을 선택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나는 1954년 피렌체의 작은 가게에서 그녀의 첫 음반을 발견했다. 그 음반은 그녀가 생활하면서 일하던 뉴욕에서 만들어졌다. 음반에서 그녀와 함께 연주한 뮤지션 중에는 클리포드 브라운, 지미 존스, 오스카 페티포드 등이 있었고, 음악은 퀸시 존스가 편곡했다. 특히 "What's New?"라는 곡이 인상 깊어서 밤낮으로 수천 번은 들었던 것 같다. 나는 1962년 RCA 스튜디오에서 헬렌을 직접 만났다.
당시 헬렌은 뉴욕에서 막 도착한 상태였고 나는 그날 아침 그녀를 만날 생각에 매우 흥분해 있었다. 예전 앨범 커버에 담겨 있던 활기차고 섹시한 헬렌의 사진이 기억났다. 그녀를 만났을 때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금방 그녀의 단순명료함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녀에게 호텔 예약을 했냐고 물었더니 아직 안 했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크리스마스여서 호텔 방을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고 말하며 방해받지 않고 함께 작업할 수 있는 내 아파트 스튜디오에서 머무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이탈리아 TV 프로그램에서 함께 일을 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밤 10시 TV에서 방영되는 "모데라토 스윙"이라는 재즈 쇼를 만들었다. 헬렌은 한 회마다 한 곡씩 노래를 불러야 했다. 나는 RCA 빅밴드를 지휘하고 듀크, 베이시, 우디 허먼, 굿맨 등과 같은 중요한 재즈 뮤지션들을 소개했다.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이 우리의 협업이 시작된 계기였다. 그녀는 방송에서 불러야 할 12곡을 함께 고르는 것 외에도 내가 작곡한 영화음악 테마 중 "My Only Man”, “Dreaming of the Past”, “Dawn” 등 세 곡의 가사를 썼다.
내가 헬렌을 만났을 때 그녀는 영어밖에 할 줄 몰랐지만 몇 달 후 그녀는 이탈리아어로 'Estate'를 부를 수 있었고, 내가 들어본 노래 중 가장 아름다운 노래 중 하나였다. 이 CD에는 헬렌 메릴이 이탈리아에서 녹음한 곡들을 모두 담고 있다. 녹음은 RCA 스튜디오와 치네치타 스튜디오에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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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리뷰 1994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안톤 베베른과 베르크, 1930년대 빈에 대한 추억

글 / 루이스 크라스너

1930년대의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과 나치주의의 발흥 등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가지 새로운 문화를 낳았고, 음악에서도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으로 대표되는 소위 '빈학파' 라는 새로운 음악운동을 탄생시켰다. 이들 '빈 학파'의 작곡가들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바이올리니스트 루이스 크라스너는 이 글에서 당시의 혼란했던 사회상과 여러 작곡가, 연주가들의 뒷얘기들을 들려준다.


괴링의 유혹을 거부한 지휘자 프리츠 부슈
 클렘페러가 어떻게 나치를 이겼는지 생각하자 그들과 관계가 있었던 또 한 사람의 지휘자가 떠올랐다. 바로 프리츠 부슈이다. 우리가 스톡홀름에 있을 때 그의 입을 통해서 직접 그 얘기를 들었다. 1938년 봄 우리는 그곳에서 베르크 협주곡 공연을 했다(주1). 연주가 끝난후 나는 부슈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러 나갔는데, 그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 주었다. 부수는 헤르만 괴링과 매우 친한 사이였다. 하루는 괴링이 부슈에게 사무실로 와달라고 했다. 공적인 자리였다. 괴링이 말했다.
 "프리츠, 상부에서 이미 결정된 사실인데 자네가 독일 전체를 대표하는 총음악감독이 되어주게. 자네는 내 친구일세, 내가 자네를 추천했고 상부에서 받아들인 것이네. 이제 나는 자네가 이 일을 맡아주기 바라고 아울러 그 일에 걸림이 되는 것을 깨끗이 정리했으면 하네."
 프리츠는 동생 아돌프를 통해서 제르킨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는데, 그는 유태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괴링이 걸림이 된다고 말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도 친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생각해 보겠노라고 말하고는 그곳을 나왔다.
 그는 내게 말했다. “나는 면담을 끝내자마자 바로 기차역으로 가서는 스위스행 기차를 탔습니다. 심지어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스위스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신분확인을 위해서 항상 여권을 가지고 다니도록 되어 있었다. 부슈는 푸르트벵글러와 슈트라우스를 위해 변호했던 일을 얘기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화난 어조로 말했다. 그들도 물론 숙청됐다.
 “당신은 그 일을 하고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든가 아니면 포기하든가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는 나치 통치 아래 생활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갖고 있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나서는 더이상 사태를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푸르트벵글러가 했던 것처럼 도시를 떠났습니다."

혼돈의 도시 빈
 스톡홀름 연주는 1938년 4월 20일에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독일 · 오스트리아 합병이 있기 5주 전이었다. 이제 나는 독일 · 오스트리아 합병 바로 직전으로 건너뛰려고 하는데 당시 빈은 혼란과 소요의 와중에 있었다. 오스트리아 나치당과 슈슈니크의 정부 사이에 치열한 정치적인 분쟁이 있었으며 슈슈니크의 내각이 서서히 그러나 아주 확실하게 그 세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날마다 수천의 친나치주의자들이 슈슈니크 정부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언젠가 겁도 없이 그 시위군중들 속에 들어갔던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얼마나 난폭하게 변했는지 보고는 놀라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만약 그들이 그때 내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들은 그곳에서 나를 갈갈이 찢어버렸을것이다. 주변에는 그들을 막을 경찰도 없었으며그 도시에서 그들은 광란의 살인자들이었다.
 그 당시의 일 가운데 특별히 나를 괴롭히는 기억이 한 가지 있다(나는 역사가들이 이것을 조사해서 진실을 밝혀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여기에 쓴다). 그것은 바로 내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이니처 추기경 사건이다. 잘 아는바대로 오스트리아는 독실한 가톨릭 국가이며, 슈슈니크 정부 또한 신실한 가톨릭을 표방했다. 이니처 추기경은 오스트리아에서 모든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정치적인 영향력도 행사할 수 있는 정신적인 지도자였다. 정부가 그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는 확실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고 정부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신문에서는 연일 이것을 보도했고 마침내 추기경이 그 일로 로마에 상담하러 불려갔다. 슈슈니크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오스트리아의 가톨릭 정부는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다시 품게되었다. 그러나 빈에 돌아온 추기경은 충격과 실망만을 가져왔다. 합법적인 정부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발표를 기대했으나 결국 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결코 그런 것은 없었다. 심지어 교황까지를 포함한 가톨릭 성직계층에도 친나치주의자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지 순진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공개적으로 반대하기에는 독일이 너무 강했으므로 살아남기 위해 묵인했던 것일까?


베베른의 마지막 배려
 바로 그 시기에 베베른과의 마지막 개인적 접촉이 있었다. 그와는 런던에서의 협연 이후에도 계속 교류가 있었다. 빈에 오면 나는 종종 그를 찾아가곤 했다. 사실 나는 1938년 3월 12일 독일 침공 시기에 뫼들링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나왔다. 그날 오후 우리는 쇤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다. 아직 초연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나는 그 악보를 갖고 있었으며, 그를 위해 연주했다. 그는 아주 기뻐했다. 3/8박자 부분을연주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말했다. "다시한번 해봐요. 마치 슈베르트 왈츠 같군요" 쇤베르크의 그 난해한 곡을 그는 그렇게 평했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는데 갑자기그가 내 팔을 잡고 몇시냐고 물었다. 시계를 보니 정각 4시였다. 그는 달려가서 라디오를 켰다. 그러자 슈슈니크의 음성이 들렸다.
 “방금 독일 군대가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습니다. 나는 형제끼리 싸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 오스트리아 장병들에게 후퇴를 명했습니다."
 베베른은 나를 잡고 소리쳤다.
 "크라스너, 여기 외투가 있어요. 빨리 뛰어서 집으로 가요!"
 그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이미 나치 깃발이 펄럭이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소리치며 축하하고 있었다.
 베베른이 말했다. "서둘러요! 두 블럭 내려가서 택시를 타요!"
 가는 길에 나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을 만났는데, 내가 지나가자 그들은 소리지르고 나를 따라오면서 협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유태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물론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마침내 두 블럭을 지나서 택시를 발견하고 뛰어들어갔다.
 “바로 제때에 택시를 잡으셨군요!" 택시 기사가 말했다. 그는 나를 빈으로 데려다 주었으며, 정말 긴 택시 여행이었다.
 항상 나는 그 일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다. 베베른은 4시에 나치가 국경을 건너고 슈슈니크가 항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베베른의 집에서 나온 후에 어떤 사람들이 그의 집에 왔을까? 그는 나를 재빨리 몰아냈다. 나는 그것이 나의 안전 때문이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아마도 내가 그의 집에 있음으로해서 그의 가족들이나 혹은 나치의 오스트리아 입성을 축하하기 위해 온 그의 친구들과 부닥쳤을 때의 당혹감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리라.


빈에서 목격한 히틀러의 모습
 택시가 숙소에 나를 내려주었을 때 여러분은상상하기를 내가 안전한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모험을 좋아하고 호기심 많은 젊은이였던 나는 상황을 알기 위해 다시 거리로 나왔다. 그후 나치 수송차량이 지나는 길가에 있는 주유소들은 가솔린을 가득 채워놓고 나치 군대가 지나갈 때마다 연료를 공급해서 그들이 전속력으로 빈에 입성할 수 있게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습을 드러냈다. 최초의 나치 전차가 도착했을 때 나는 링슈트라세에 있는 황제 호텔 앞에 있었다. 그리고 곧 한 사람이 나타나 무개차에 서서 팔을 뻗쳐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바로 히틀러였다. 이것은 내가 베베른의 집에서 라디오로 슈슈니크의 음성을 듣고 난 두세 시간 후의 일이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환호하거나 환영하는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 저녁 내내 나는 거리를 배회했으며, 빈 외곽에 정차해 있는 나치 전차들을 보았다. 그리고 사방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다음날 아침 신문에는 임박한 히틀러의 도착을 환영하는 발표로 가득 찼다. 새로운 입장인 셈이다. 이번은 수천의 환호하는 지지자들로 잘 준비된 입장이었다. 나는 그 어디에서도 히틀러가 실제로는 빈에 두 번 입성했었다고 쓴 것을 보지 못했다. 너무 서두른 첫번째는 충격에 싸인 도시의 텅빈 거리밖에 보지 못했다. 두 번째는 선전전술에 의해 전형적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그후 곧 독재가 시작되었다.
 그 다음 수주 동안에 나는 폭군의 군대를 포함해서 몇몇 나치들과의 더 심한 이변을 경험했다.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손해보지 않았다. 이겼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내가 얼마나 무모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모했지만 승리한 나치와의 대결
당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한 사건을 말하겠다. 그러나 우선 그 배경부터 약간 설명해야겠다. 나치의 점령으로부터 오스트리아를 지키려는 최후의 몸부림으로, 슈슈니크 수상은 국민투표를 해서 반 나치 여론을 조성함으로써 히틀러 를 누르려고 시도했다. 오스트리아 국민은 독립 할 것인지 아니면 나치 지배 아래 통합할 것인지를 투표로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당연히 히틀러는 국민투표 결과로 빌미를 주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던 것이다. 약 한 달 뒤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양국에서 실제로 국민투표가 실시됐는데 결과는 나치가 99%의 지지를 얻었다. - 적어도 숫자로는 그랬다.
 국민투표가 시작되기 전에 한동안 곳곳에 플래카드가 걸렸고, 거리에는 분필과 페인트로 쓴 구호가 난무했다. 그후 나치는 유태인들에게 이러한 거리의 구호를 지우는 일을 시켰다. 그들은 큰 길에서 사람들을 가로막아 세우고는 유태인들에게 그 일을 시켰다. 따라서 그때의 사람들은, 오페라 극장 앞의 모퉁이를 지나가면서 유태인 교수들이나 의사들이 물 한 양동이를 옆에 놓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반나치 구호를 문질러서 지우는 모습을볼수 있었다. 나는 그일을 해야만 했던 나의 친구에게 그 사실을 들었으며 나 자신도 몇번이나 하게 될 뻔했다. 더이상 감히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내 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 그런 일을 하도록 강요당한다면 맞서 싸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내가 예상하고 있던 사태가 발생했다. 그때 나는 여행을 하기도 하고 연주회도 하면서 아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프리츠 부슈와 했던 스톡홀름에서의 연주도 그때 한 연주들 중 하나였다. 이런 연주 여행에서 빈으로 돌아올 때 나는 보통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를 이용했다. 나는 그 여행사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모두 미국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언제나 친절할 뿐만 아니라 또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독일인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치가 정권을 잡자, 나는 과거와 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거의 내게 말조차 건네지 않았고, 나는 이제 더이상 그곳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즉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를 떠나서 오페라 극장으로 되돌아오는 도중에, 내 쪽을 향해서 똑바로 걸어오고 있는 검은 군복을 입은 두 명의 나치병사를 만났다. 키가 큰 녀석들이었다. 약간 긴장하기는 했지만 나는 이러한 상황에 화가 치밀었다 나는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나는 그들 정면으로 걸어갔고 그들은 나 때문에 서로 갈라져야 했다. 내 생각에 그들은 놀란 것 같았다. 아마 그때까지 반나치주의자들도 그들 앞에서는 움츠러들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지나가고 난 뒤에 갑자기 그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너!"
 나는 돌아서서 말했다. "나 말이오?”
 “이리 와봐!"
 “왜 그러시오?'’
 “이리 와보라니깐!"
 “할 말이 있으면 ‘이리로 와서 하시오."
 내가 보기에 이들은 제대로 훈련받은 군인이 아니었는데,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방금 군대에 들어와 훈련도 받지 못한 문맹의 오스트리아 나치인 듯했다. 그들이 내게로 걸어왔다. 그들은 말했다.
 "우리와 같이 가야겠소. 거리에 있는 저 건물에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소"
 내가 주춤하자 그들은 내 옆구리를 잡고 내게 말했다.
 “같이 가는 게 나을 거야!"
 나는 순순히 응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아주 우아한 건물로 들어가서 4층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건설회사 사무실의 문을 열자 담당하고 있던 여자가 소리쳤다.
 “맙소사, 어디 있었어요? 얼마나 오래 기다렸 다구요"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길거리에 쥐새끼 한 마리라도 있어야 말이지. 이 작자가 우리가 겨우 발견한 유일한 놈이야.’
 그리고 나서 그는 나를 돌아보고 명령했다.
 “이 방에 쌓여 있는 잡동사니 물건들을 지하실로 옮겨다 놔!"
 “하지 않겠소! 당신들이 할 일을 왜 내가 한단 말이요?”
 “우리는 이미 충분히 했어!"
 그가 내게 다가와 내 얼굴에 대고 소리쳤다.
 “이제 네 차례란 말이야, 명령을 따르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어디 할 말 있어?”
 “있소"
 나는 안주머니에서 붉은색 여권을 꺼내 그들의 코앞에 내밀었다.
 “여기 있소"
 그들은 내 미국 시민권을 보고는 셋이 서로 바라보면서 어쩔 줄을 몰라 당황했다. 마침내 그 들 중 하나가 큰소리로 말했다.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유를 말하겠소. 그저께 런던과 빈에서는 결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부인하는 독일 정부의 성명서를 신문에서 읽었고, 그 다음날 암스테르담에서도 다시 부인하는 내용의 기사를 보았으며, 바르샤바에서도 같은 내용의 기사를 읽었소. 나는 내 눈으로 정말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오. 이제 진실을 알게 됐소"
 그래서 그들은 나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얼마나 떨렸던지. 나는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나는 이제 나를 적대시하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링슈트라세를 건너서 두 블럭쯤 내려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차들이 질주하는 그곳에 스웨덴 여행사가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반쯤 길을 건넜는데 아까의 검은 군복들이 나를 따라왔다.
 "당신 여권을 디시 한번 봅시다."
 경험이 없어서 당황한 그들은 내 여권을 펼쳐서 조사해 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이번에는 비자를 아주 자세히 조사했다. - 모든 것이 다 제대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두 번째로 나를 풀어 주었다.
 여행사에 도착하자 나는 미국 영사를 불러서 말했다.
 "이제 어느 곳이든 밖에 나오기가 두렵습니다."
 그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지 알려 주었다.
 "이런 일들이 미국인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베를린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람들은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루이스 크라스너는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한 바 있다.


베베른을 변호하다
 공포의 시간들이었다. 나는 유럽에서 연주활동을 했지만, 겁에 질린 친구들 을 만나고 그들이 빈을 떠나는 것을 돕기 위해 언제나 빈으로 돌아왔다. 나는 영사관의 비자 지원자들 명단의 맨 첫번째에 그들의 이름이 적히도록 하려고 애썼다. 그런 방식으로 빈을 탈출한 많은 내 친구들 중에는 쇤베르크의 딸 게르투르드와 사위 펠릭스 그레이슬레, 루돌프 쿠르츠만 박사가 있었다. 쿠르츠만 박사는 아내 없이 홀로 미국에 와서 우리와 함께 살다가 후에 보스턴에 정착했다(그의 아내 리타는 작곡가 어윈 로이처와 재혼해서 아르헨티나로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천명의 사람들이 이민을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해 말 미국에 돌아왔을때 나는 최근 자신의 조국에서 이민한 에드바르트 스토이어만과 연락이 됐다. 그는 수년 동안 쇤베르크 서클을 주도해왔으며 서클의 중요한 초연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곤 했다. 그가 내게 말했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쇤베르크가 몹시 염려하고 있어서요. 우리는 베베른이 나치와 관계가 있고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을 여러번 들었어요. 사실인가요? 그게 사실이라면 쇤베르크에게는 충격이 클 거요. 그는 베 베른에게 대단한 찬사를 보내며 자신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헌정했습니다.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는 그것을 취소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절대 그맇지 않습니다."
 나는 그에게 열심히 거짓말을 해댔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 보건대 내가 그렇게 한 것이 기쁘다. 내 짐작에 그는 내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던 것 같다. 심지어 쇤베르크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헌정을 취 소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 그는 웅장하고 화려한 악구를 없애버린 것 같다. 그러나 베베른에 바치는 헌정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베베른은 전쟁으로 인해 깊은 정신적 상처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공개되지 않았던 이야기
 전쟁의 발발과 함께 사실상 베베른과의 연락은 단절되었다. 그리고 그와의 개인적인 연락이 끊어졌으므로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지금까지 공개된 적이 없었던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싶다. 그것은 쇤베르크의 아들 게오르크로부터 전해들은 사실이었다. 나는 지금이 이것을 공개할 적절한 시기인지, 아니면 백 년쯤 더 기다려야 하는 건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그러나 나는 빠를수록 좋다는 쪽으로 생각을 굳히기로 했다.
 쇤베르크는 알렉산더 젬린스키의 누이동생과 첫번째로 결혼했는데, 그들 사이에는 딸인 게르투르드와 아들 게오르크가 있었다. 게르투르드는 1938년 미국으로 이민 왔고, 게오르크는 전쟁 동안 빈에 남아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30대를 보냈다.
 나는 진쟁이 끝난 1950년 초에 그를 빈에서 만났다. 그는 길혼도 했고 아이들도 있었다. 놀랍게도 딸 가운데 한 명은 벌써 결혼할 나이였다. 그는 딸에게 지참금을 마련해줄 수 없다고 걱정 했다. 그에게는 아버지 쇤베르크가 준 그림 3점이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팔기를 원했다. 물론 나는그것을 샀다. 나는 그가 원하는 만큼의 돈을 지불하기는 했지만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빈 을 떠나기 직전에 그의 딸을 만나서 조금 더 주었다.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 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 그림-쇤베르크 자신이 그린 유화-을 갖고 있다. 그것들 중에는 전쟁 때의 총알 구멍이 남아 있는 것도 있다.
 나는 게오르크에게 전쟁 기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었다. 우리는 여러 시간 동안 얘기했다. 그는 그 당시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매우 곤란한 상태였다. 일자리도 거의 없었고 때때로 일반 간행물의 사본을 만드는 일을 했다. 유태인이었던 그는 항상 숨어 지내야 했다. 그는 말했다.
 “베베른이 나를 많이 도와주었어요 먹을 것을 주었고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의 아파트에 나를 숨겨주기도 했구요."
 사실 게오르크는 베베른의 가족 때문에 일이 애매하게 되어서 죽을 뻔한 적이 한 번 있었다. 물론 그들 입장에서 보면 전혀 고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 마지막주에 베베른과 그의 아내는 잘츠부르크 근처 밀터질에 있는 딸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 뫼들링의 집을 비웠다. 그들은 거리에서 지내고 있던 젊은 쇤베르크에게 아파트를 넘겨 주었다. 뫼들링은 빈의 동쪽 외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군이 최초로 들어오는 곳 중의 하나이다. 물론 러시아군은 반나치주의자들에게 환영받았다. 그 당시 사람들은 나치 치하에서 고생을 너무나 많이 했기 때문에 환상에서 깨어나 반나치가 되어 있었다. 젊은 쇤베르크도 어느 날 갑자기 러시아 장교에 의해 나치 스파이라는 이유로 체포되기 전까지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병사들이 그를 마당에 세워놓고 처형할 준비를 했다. 그는 그들에게 애원했다. 아무도 그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가 너무나 시끄럽게 소동을 피웠으므로 처형이 연기됐다. 하루인가 이틀 후 또다른 러시아 장교가 그를 다시 조사해 보고 역시 또 그가 나치 스파이라고 단정했다. 다시 한 번 그들은 그를 처형하려고 했으나 또 한번 그는 구제됐다. 세 번째는 운좋게도 유태계 러시아 장교가 그를 조사했는데 그는 독일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완강하게 저항하는 게오르크의 반응을 보고 그 유태인 장교는 각 아파트에서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의 지하실로 그를 데리고 갔다. 베베른의 집 창고—물론 젊은 쇤베르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벽이 무너져 있었고 탄약과 총 그리고 온갖 종류의 나치 물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장교가 물었다.
 “이곳이 당신 아파트 창고 맞지요? 이것들을 뭐라고 설명할 건가요?"
 게오르크는 러시아 장교에게 그가 어린 시절 부터 하고 있었던 다윗의 노란 별을 보여주었고 마침내 그 장교에게 이 아파트의 창고가 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릴 수 있었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점이 있다. 베베른은 자신의 아파트 창고에 그런 물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의 사위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것들을 그곳에 몰래 갖다놓았단 말인가?
 나는 게오르크에게 물었다.
 “베베른은 어떻게 그런 것들로 인한 환멸의 감정에서 견뎌 냈습니까? 전쟁 동안 매우 견디기 힘들었을 텐데." 게오르크는 내 질문에 놀란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물론 그것은 베베른이 바르셀로나행 기차에서 내게 했던 이야기들로 미루어 내가 짐작 한 것이다. 나는 그가 어떤 상황을 기대했는지 알고 있었다.
 게오르크는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단지 나 혼자서만 그것을 지켜 보았지요、베베른은 전쟁 때 형언하기 어려운 종류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육체적인 류의 궁핍이 아니라 내면의 죄의식 - 양심의 고통 말입니다. 그는 자신이 환상 때문에 가장 친한 친구를 배신했다고 괴로워했습니다. "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크라스너의 의뢰로 6주만에 작곡되었다.


베베튼의 최후
 나는 게오르크에게 베베른이 어떻게 해서 뜻하지 않게 미군의 총에 맞았는지 물었다. 그의 설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이야기와는 달랐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베베른의 사위 중 한사람이 암거래에 연루되어 있었는데, 미군이 그날 밤 그를 체포하러 갔다. 그들 중 몇 명이 암시장 거래를 위해서 온 것처럼 위장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동안에 밖에 있는 군인들이 집을 포위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베베른이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왔다가 신경질적인 열성파 군인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베베른이 잘츠부르크 근처 산악지방에 있는 동안 게오르크는 빈의 동쪽 외곽에 있었기 때문에, 그사건의 목격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연관된 다른 내용의 이야기를 거의 확실한 것이라는 태도로 말했다. 그것은 내부 조직 들 사이에 알려진 것으로 그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려진 것처럼 베베른의 사위들은 나치 고위 당원이었다. 그리고게오르크의 말에 의하면 그 가운데 한 명은 미군이 전범으로 지명수배 한 인물이라고 한다. 고급 장교인 그는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게오르크는 이 사위는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바로 이 시간에 남미에서 살고 있다는 비밀을 털어놓았다.
 “미군이 그를 찾으러 왔었지요. 그들은 등화 관제가 있었던 아주 칠흑 같은 밤에 그 집에 접근했지요. 베베른이 우연히 담배를 피우러 나온 것이 아니었어요. 그가 군인들을 보고 그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일부러’ 밖으로 나와서 성냥불을 켜고 담배를 피운 것이지요. 그 동안에 뒷문을 통해서 사위는 도망쳤고, 그와중에 베베른이 총에 맞은 것입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베베른이 총에 맞는 순간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만약 내가 소설가라면 베베른 같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해서 소설을 쓸텐데. 소설 속의 그는 문화발전과 인도주의에 대한 자신의 소망과 믿음을 순전하게 확신하고 있는 고귀한 사고의 소유자로 묘사될 것이다. 그는 지능적으로 나치에게 이용당해 회생되며 자신의 생각의 오류를 깨닫고 환상에서 깨어나 고통받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베베른처럼 종교적인 인물일 것이다. 병사의 총에 의한 그의 죽음은 그에게는 구원이라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 순간 그는 마음속 으로 ‘오 나는 구원받았다. 이제 불타는지옥에서 영원히 보내지 않아도 되리라. 나는 지상에서 죄값을 치렀다. 나는 구원받고 속죄했다.’라고 외쳤으리라. 이것이 죽음의 순간 그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에게는 죽음이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게오르크의 생각도 비슷했다. 그는 베베른의 죽음을 ‘제3자에 의한 자살'이라고 불렀다.

이상주의로 뭉쳤던 세 작곡가
 나는 베베른이 죽은 지 2년 후인 1947년 쇤베르크가 죽은 동료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화해의 정을 담아 쓴 성명서를 발견했다. 이것은 특별히 베베른 협주곡 Op. 24에 포함할 의도로 쓴 듯했는데, 그 곡은 다음 해에 르네 라이보비츠가 출판했다. 그 협주곡은 물론 쇤베르크에게 헌정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제 잠깐 동안이지만 우리를 갈라놓았던 모든 일들을 잊어버립시다. 우리들에겐 사후의 미래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베르크, 베베른. 쇤베르크 우리 세 사람을 한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깨달았던 것을 헌신과 열정을 가지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그런 것 때문에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성명서는 1947년 6월 쇤베르크의 자필원고를 복제해서 다시 출판되었다. 이 글은 ‘빈의 3인조 현대음악가들’ 을 역사적인 관점으로 다루었다. 우리 세 사람을 함께 활동하도록 묶었던 것은 우리들의 이상주의적인 성향이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부분은 애매모호하게 쓰여졌다. 이 성명서에 관심을 가질 만큼 어리석은 음악학자들은 없을 것이다. “…우리를 갈라놓았던 일들을 잊어버립시다..." 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나치의 덫에 걸려 잘못된 길로 빠졌던 베베른을 의미하는 듯했다.

진정 ‘살아있는음악’을위하여
 이제 나는 결론을 맺으려 한다. 그러나 나는 베베른의 나치와의 연루, 뜻밖의 우연한 죽음, 쇤베르크의 화해의 글 따위의 우울한 분위기로 이 글을 마치고 싶지 않다. 베베른의 생애에는 많은 긍정적인 면들이 있었으며, 천재로서의 감동적인 일면이 있었다. 그는 내가 좋아하며 또 한 본받고 싶은 장점들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베베른이 음악 활동을 하는 방식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 즉 좀더 구체적으로 쿠르츠만 박사의 거실로 돌아가 베토벤 소니타를 분석하기 위해 모든 동기들의 의미와 기능을 조사하는 방식에 대한 것으로 끝맺으려 한다. 한 작품의 감정적이고 지적인 원천의 그 중심에 도달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해야 할 일이 있다. 베베른이 그랬던 것처럼 그 곡의 내면까지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와 똑같은 길문을 해야 한다. 첫 반쩨 모티프는 그 다음에 나오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었는가? 왜 다른 방식이 아니고 이런 방식으로 등장하는가? 여러분은 시도해볼 수는 있어도 어떤 음을 낼 것인지는 상상할 수 없다. 한 악절이 다른 악절로 이어지는 것처럼 각 모티프들은 앞의 것을 뒤따르며 곡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윈래의 음악적 의도가 표현된다.
 만약 당신이 한 곡을 연구하려고 한다면 작곡가가 그 곡을 쓸 동안의 느낌까지 그 과정에 포함시켜야만 할 것이다. 즉 그 작품의 작곡가가 되어서, 그것이 당신의 곡이 되어야만 한다. 나는 그맇게 생각힌다. 내가 모차르트 협주곡을 연주할 때는 그 곡은 모차르트의 작품이면서 동시에 나의 것도 된다. 나는 모차르트와 그 곡을 나뉘어 가지며 그의 의도를 뒷받침하고 해석한다.
 물론 오늘날에는 모든 연주자들이 다 이런 방식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젊은 음악가들은 테크닉이 좋아서 모차르트 협주곡을 두 번 연습해 보고는 공연하기도 한다. 그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음악을 창조 해내는 방법이 아니다. 그 곡과 호흡을 같이 해야 하며 베베른이 그랬던 것처럼 각각의 음들을 조사해보고 그것이 지닌 의미를 느껴야 한다.
 단순히 악보를 보고 하는 연주가 아닌 악보를 읽고 당신이 다시 재창조해서 음악이 당신 몸을 통해서 나오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나무를 보이는 그대로 사진처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상상 속에서 나무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그리는 인상주의 그림과 같은 것이다. 나는 이 방법이야말로 진정한 ‘살아 있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누군가 인터뷰 도중에 물었다.
 “초기의 당신 연주와 현재의 연주 스타의 차이점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스타일은 디자이너들에게나 있는 것이지요 음악가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
 요아힘은 자신의 방식대로 연주했다. 그러자 그에게 배운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들은 그의 방식대로 연주했다. 그리고 나서 독특한 개성을 지닌 비에니아프스키가 나왔고 이어서 하이페츠가 등장했다. 한동안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들은 하이페츠적인 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그 다음에는 크라이슬러였다. 이런 식으로 상황이 계속되었다. 연주 양식은 자신이 느끼는 강렬한 음악적 느낌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연주자의 몫이다. 그러나 개성이 강한 연주 양식은 특히 젊은 음악가들에게는 위험한 함정이 될 수도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종종 모방하기 쉽기 때문이다.
 본론에서 벗어나 너무 내 생각에 치우친 듯하다. 나는 베베른의 음악 해석 방법에 매우 강렬하게 매료되었다. 물론 그것은 바르셀로나의 경우처럼 실패할 위험부담이 있기는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그는 런던에서는 성공했다. 나는 그 방식을 믿으며 오늘날 우리의 음악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송인경 역)


루이스 크라스너
크라스너는 1903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다섯 살때 미국으로 이주했다.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공부했으며 유럽과 미국에서 독주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후 1944년부터 1949년 시라쿠세로 이주할 때까지 미트로풀로스가 지휘하는 미네아폴리스 심포니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 있었다. 그곳에서 시라쿠세 심포니의 연주여행에 참여했으며 지방의 실내악 에호가 모임을 조직했다. 1972년까지 대학에서 바이올린과 실내악을 가르쳤다. 1976년 이후로 뉴잉글랜드 음악원과 탱글우드에 있는 버크서 음악센터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작곡을 의뢰해서 초연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잘 알려졌으며 또한 베르크의 협 주곡을 최초로 녹옹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쇤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해서 녹음하기도 했다. 광범위한 분야의 현대음악에 관계했으며 그밖에 그가 초연한 현대 음악 작품으로는 카세라와 세션의 곡, 그리고 코웰과 해리스의 소픔들이 있다. 코웰과 헤리스에게는 바이올리니스트 자신이 직접 작곡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의 음반목록에는 작곡가가 직접 피아노 반주를 맡았던 피스턴의 소나타와 미트로풀로스가 지휘하는 쇤베르크 세레나데의 바이을린 파트가 포함되어 있다.

(주1)
크라스너는 스웨덴 방송국에서 녹음한 이 공연을 매우 인상적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로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우연한 기회에 녹음하게 된 음반이었다. 1970년대 초 그 가 스위스 크란의 아메리칸 페스티벌에서 강의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느날 한 신사가 그를 찾아와서는 혹시 스톡홀름에서 베르크 협주곡을 연주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가 그렇다고 하자 그 신사는 자신은 스톡홀름 필하모닉에서 왔으며 오케스트라의 50주년 기념일을 축하하는 음반을 위해 크라스너가 연주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음반의 프로그램에는 브부노 발터와 프리츠 부슈를 비롯한 음악가들의 공연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크라스너는 베르크 협주곡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음반은 오케스트라의 후윈자들만을 위한 제한적인 성격의 음반이었다. 이어서 크라스너의 뉴잉글랜드 음악원 동료인 군트리어 슐러가 베르크 협주곡의 재발매권을 얻어내 1984년 출반했다. 이 음반에는 1954년에 있었던 크라스너와 미트로풀로스의 쇤베르크 협주곡 연도 포함되어 있다. 이 음반 (GM 2006)은 아직도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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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리뷰 1994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안톤 베베른과 베르크,1930년대 빈에 대한 추억

글 / 루이스 크라스너

1930년대의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과 나치주의의 발흥 등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가지 새로운 문화를 낳았고, 음악에서도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으로 대표되는 소위 '빈 학파' 라는 새로운 음악운동을 탄생시켰다. 이들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바이올리니스트 루이스 크라스너는 2회로 연재되는 이 글에서 당시의 혼란했던 사회상과 여러 작곡가, 연주가들의 뒷얘기들을 들려준다.

귀족 출신의 작곡가 베베른
안톤 베베른은 작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마르고 강단있는 사람이었다. 좁은 얼굴에 뚜렷한 윤곽의 소유자였으며 눈은 부드럽지만 한번에 상대를 꿰뚫는 듯했다. 외모로 보아 그는 강해 보인다기보다는 유순한 인상이었으며 말이 없지만 정중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자신이 귀족의 혈통임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는 수세기동안 작위를 이어온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비록 내가 그를 알고 있었던 동안에는 결코 '폰' 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내 생각에는 그런 경향이 그후 히틀러 시기에 종종 활자로 표면화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는 종종 생각에 몰두해서 마음이 사고의 한 켠에 빠져있기도 했다. 독일 문화의 우월성과 그들에게 부여된 역사적인 역할 수행에 대한 그의 믿음은 대단히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물론 그러한 생각들이 그를 사고의 심연으로 이끌었다.
1930년대초 나는 젊은 작곡가들과 빈에 있는 쇤베르크 서클과 친분이 있는 다른 음악가들을 통해서 베베른을 몇차례 만났다. 때때로 연주회를 마치고 자리를 옮길 때 그들이 자주 가는 카페 박물관에 있는 '슈탐플라츠', 혹은 프란치슈카너 켈러 근처에서 열리는 모임에 베베른과 함께 초대받기도 했다.

베베른은 친구 베르크의 협주곡 초연의 지휘를 맡겠다고 자청했다.



베토벤과 함께 작곡하는 것 같았던 베베른의 레슨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추억속에서 나를 들뜨게 하는 심오한 음악적 경험은 베베른이 피아니스트이자 반주자인 나의 친구 리타 쿠르츠만 박사와 그녀의 남편 루돌프의 집에서 초대받은 몇명의 음악가들에게 했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레슨이었다. 이것은 내게는 음악의 계시와도 같았다.
 베베른은 피아노 소나타 한두 소절을 연주하고는 아주 상세하게 각 소절의 모티프와 음악을 분석하곤 했다. 그는 음악적 내용의 가장 은밀한 내면의 표현, 각각의 부소절들의 의미와 관계, 각각의 단계들의 필연성들따위를 찾아내곤 했다. 그의 몸짓은 조각과도 같았고 그들은 공기중에 떠도는 그의 메시지들을 형상화하려는 듯했다. 조용한 목소리는 때로 주춤거리기도 했지만 언제나 대단히 표현력이 넘쳤으며 정감있었다. 감상자들은 방의 출입구에 조용하게 앉아있었고 나에게 그 레슨은 매우 감동적이었으며 거의 신비에 가까운 경험이었다. 베베른은 마치 지금 베토벤과 함께 소나타를 다시 작곡하는것처럼 보였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베르크 바이올린 협주곡의 초연
 알다시피 나는 1930년대 초에 베베른의 친한친구이자 동료인 알반 베르크에게 바이올린 협주곡을 의뢰했는데 그는 그 곡을 1935년 봄에 6주에 걸쳐 작곡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 작품의 관현악 연주를 듣지 못하고 불행하게도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쉰 살의 나이로 죽었다.
 2주 후인 1936년 1월 미국에 있는 나에게 빈국제 현대음악 협회(ISCM) 로부터 전보가 왔는데 그 해 4월 19일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ISCM 축제에 그 곡을 선보이기 위해 원래는 1년 뒤로 잡혀있던 그 곡의 초연 날짜를앞당겨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곧 이어서 베베른으로부터 베르크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자신이 직접 지휘를 맡고 싶기때문에 나에게 그 일이 추진되도록 힘써달라는 내용의 편지가 왔다. 물론 나는 베베른의 요청에 따라 그 제안에 찬성했다. 나는 베르크의 새로운 작품을 연구하고 서로 호흡을 맞춰보기 위해 바르셀로나 축제의 리허설 날짜보다 미리 빈에 도착했다.
 그러나 무언가 일이 잘못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빈에 도착했을 때 ISCM 위원회는 긴급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참석자는 에른스트 크레네크, 폴 피스크, 빌리 라이흐를 비롯해서 그밖에도 두세 명의 사람들이 더 있었다. 회의장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사태를 직감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실망스러웠다.
 누군가 내게 말했다.
 "방금 베베른이 지휘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왜요?"
“단지 하지 않겠다고만 합니다. 당신이라도 그를 데리고 올 수는 없을 겁니다. 그에게 연락이 되지 않아요 그는 어느 누구도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말했다.
"나를 그의 집에 데려다 주시오. 이유라도 알아야 할 것 아니오"
"안 됩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들은 계속 걱정하기 시작했다.
"어디에 가서 지휘자를 구한단 말인가? 어니스트 앤서멧이 해줄까? 누가 우릴 위해 지휘봉을 잡겠는가? 우리는 돈도 없는데.”
나는 말했다.
“만약 당신들이 다른 지휘자를 찾는다면 바이올리니스트도 찾아봐야 할 것이오. 내 조건은 오직 베베른과 함께 공연할 때만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오."
물론 그들은 말했다.
"크라스너,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나를 베베른에게 데려다 주시오"
그래서 나는 갔다.
나는 베베른을 위해서 협주곡을 연습해왔고 그것은 내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작품에는 알레그로에서 알레그로로, 또 6/8박자에서 4/8박자로 변하는 따위의 리듬이 복잡한 부분이 몇 군데 있었는데 그렇게 연주하기 어려운 부분이 나올 때마다 나는 그에게 묻곤 했다.
"우리가 정말로 이것을 해야만 됩니까? 정말 저 부분을 연주해야만 하나요?"
 확신하건대 그럴 때마다 그는 이러한 여러가지 문제들에 해결점을 제시하곤 했다.
그는 그 곳에 앉아서 지휘했다. 우리가 네번 맞춰보고 난 후에 나는 그에게 물었다.
"베베른, '정말로' 하기 싫은 겁니까?"
“하고 싶어요”
그는 시인했고 바르셀로나행을 승낙했다.
 그러나 스페인행을 결정하기는 했지만 그는 독일을 경유해서 갈 것을 고집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빈에서 바르셀로나로 갈 때는 스위스를 통과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굳이 독일을 들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이미 그렇게 가는 티켓을 사놓은 형편이었다. 사실 베르크의 미망인과 빌리 라이흐가 2, 3일 뒤에 우리를 따라왔는데 그들도 스위스를 거쳐서 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고집을 부렸다.
 "가겠소. 그러나 조건이 있소 독일을 거쳐서 가야 하고 당신도 나와 동행해야만 하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기로 쾌히 승낙했다. 그가 마음을 돌렸다는 것만으로 너무나 기뻤기 때문이다.

베베른과의 기차여행
 기차에는 거의 손님이 없어서 객실에 우리 둘밖에 없었다. 뮌헨에 도착하자 그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 밖으로 나가서 맥주나 한잔 합시다. 내가 사지요"
 그런데 이것은 그에게 드문 일이었다. 내성적이고 수줍어하는 성격의 그는 놀기 좋아하는 애주가가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와서 식탁이 수백개는 족히 됨직한 기차역에 있는 커다란 식당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한명도 없었다. 재빨리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 앞에 웨이터가 발꿈치를 까딱거리며 서있었다. 베베른은 말했다.
 “진짜 바바리아 흑맥주 큰 걸로 두 잔 주세요.”
 잠시 후 주문한 맥주가 나왔다. 내가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맥주를 마셨다. 베베른은 자기가 술값을 내겠다고 고집했고 15분 뒤에 우리는 기차의 객실로 돌아왔다.
 기차가 출발했고 스위스 국경선까지 가는 데 반시간 정도 걸렸으며 국경선을 넘었다. 베베른이 나를 돌아보며 독일어로 말했다.
“누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하던가요? 당신에게 해를 입힌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알다시피 그때 우리는 독일에서는 유태인들을 모두 거리에서 잡아가고 있으며 경찰이 연행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씌어진 외국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걸 보고난 베베른이 말했다.
 "이제 이걸로 우리가 그 동안 들었던 독일에 관한 모든 과장된 기사들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셈이 되는 거요. 모두 다 왜곡된 선전이란 말이오!"
 이런 순진한 사람 같으니라구. 그 기차는 국제 칸이었으며 그런 말을 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관점을 주장하기 위해 여전히 그 사건을 예로 들었다.
 우리는 정치적인 관점에 대한 장시간에 걸친 토론에 들어갔다. 그는 전에도 그것들을 내게 설명했던 적이 있었다. 이제 그는 20시간 이상가야하는 긴 여행길의 동반자인 나에게 친밀한 대화로 밤을 보내는 비좁은 기차 객실에서 그것들에 대해 대단히 자세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지경에 빠진 현재의 타락한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수한 옛 독일 문명뿐이란 말이오."

12음 기법의 창시자 쇤베르크는 빈 악파를 탄생시킨 작곡가이다.


히틀러를 지지한 베베른
알려져있듯이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사회적으로 혼란한 상태였다. 이 나라는 베트남전 당시의 미국과 흡사한 상황이었다. 학생들이 캠퍼스를 장악하고 농성하고 무장한 시위군중들이 경찰과 대치했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 어느 때까지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것이며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지 모두들 궁금해했다. 지금 중부 유럽에 바로 그런 종류의 기류가 흐르고 있는데 단지 사태가 좀더 나쁘다는 것만 다르다. 이곳에는 어느 정도 조절하려는 기운이 있지만 빈에는 전혀 그런 분위기가 없다. 젊은이들의 태도는 너무나도 냉소적이며 카페와 거리에서의 그들의 행동은 나이든 세대가 보기에는 정말로 걱정스러울 따름이다. 베베른 같은 사람들은 세계가 길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그처럼 훈련과 수양도 없는 급진주의자들의 집단 처럼 되어 버렸다. 그들은 하기를 어떤 단호한 독자만이 그 사회의 산재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며 서양의 인도주의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 베베른에게 “왜 하필 히틀러 같은 사람이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의 대답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는 말할 것이다. "우리가 읽었던 이런 잔악한 짓들이 실제 상황인지 누가 아느냐? 내가 아는 한 그것은 중상모략이다!"
 “베베른, 쇤베르크를 비롯해서 당신의 친구들은 전부 유태인들인데도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견해를 따를 수 있단 말이요?" 어떻게 유태인 문제에 대한 결론을 이렇게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많은 유태인들이 동유럽-폴란드, 러시아, 루마니아-으로부터 이동하고 있으며 곤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참사와 부패한 상황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유태인들이 동유럽에서 급진적인 이념들과 함께 이동해왔다고 그 재앙의 원인을 유태인들의 탓으로 돌린다. 사람들은 유태인들을 구두쇠라고 비난한다. 유태인들은 동유럽에서 빈손으로 이동해온 가난에 찌든 사람들인 동시에 모든것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돈을 가진 자본가들이기도 했다. 어느 쪽인가?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쇤베르크도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것을 밝혀야만 하겠다. "심지어 쇤베르크도 그가 유태인이 아니었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랐을텐데."
 이것이 1936년의 일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베베른이 그의 직업적인 생활과 가족 사이에 끼어 심한 갈등을 느꼈던 듯했다. 그는 가족들에게 헌신적이었으며 그들을 매우 사랑했다. 언제나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뫼들링에서 딸과 사위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들 부부는 적어도 독일 · 오스트리아 합병 전까지는 히틀러를 위해 일하는 은밀한 나치 지지자들이었다.
 그러나 음악활동을 위해서 도시로 오면 그는 다른 세계로 통하는 또 하나의 벽을 건너야만 했다. 그의 음악적인 활동은 전적으로 그의 가족들과는 정반대의 이데올로기를 지닌 친구들에 의해서 지원받고 있었다. 1920년대와 30년대초 빈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 지배되었다. 급진적 사상의 이들 사회주의자들 때문에 때로는 '붉은 빈' 이라고불리기도 했다. 베베른의 친한 친구들은 대부분 이러한 좌파사람들이거나 유태인들이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들 중 한사람인 데이비드 조지프 바흐는 사회주의 정부의 문화적 지도자였다. 베베른에게 연주회를 열어주었던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뿐이었다. 그는 정기적으로시 정부가 지원하는 합창단을지휘했으며 또 사회주의 정부가 후원하는 '노동자들의 오케스트라' 라고 불리는 관현악단과 공연하기도 했으며 좋은 공연을하기 위해 그가 원하는 만큼 리허설을 가질 수도 있었다.
 1934년까지 이런 상태가 계속됐다. 그러던중 내전이 일어나 상황이 복잡하게 변했는데 실제로 내전 기간중에는 대포가 사용되기도 했으며 총격전이 있었고 사상자가 생겼다. 사회주의자들이 패해서 사회당은 불법단체가 됐다. 파시스트 국민정부가 설립됐으며 예상했던 바대로 이정부는 나치 집단의 압력에도 끄덕없이 잘 견뎌낼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원주민이라는 사실만 제외하고는 이데올로기 자체는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후 사회주의 정부의 후원을 받던 예술가들은 하루 아침에 거리로 내몰렸다. 어떠한 공연도 후원을 받지 못했다. 베베른의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아서 잠시동안 미국의 퀘이커 교도들이 궁핍한 음악가들에게 음식을 보내주었으며 절박한 상황에 처한 그들을 도왔다.

이상주의에의 매몰
 장시간에 걸친 기차 여행 중에 슈슈니크 수상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파시스트 정부를 지나쳐왔다. 베베른은 그 정부를 반대했으며 나치 하에서의 생활이 더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 모든 것이 밝혀지고 그 다음에 나치주의의 정당성이 드러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히틀러의 도래 이후 이 위대한 독일 문화는 계승될 것이며 사회가 재건될 것이다. 물론 그후 그는 소위 말하는 나치주의의 정당성의 정체를 알게됐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것에 빠져있었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되기를 희망했다. 그를 변호하기 위해서 나는 그가 때로는 학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순진하고 이상주의자인 성향의 소유자라는 것을 덧붙여야만 한다. 그는 13, 14세기의 독일 고음악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것들에 푹 빠져 있었다. 뮌헨 기차역 사건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천진난만한 점이 있었다. 한편으로 볼때 이런 점들이 그를 가족들의 정치적 · 개인적인 압력에 쉽게 넘어가게 했던 것이다. 다른 면에서는 이것은 그의 영혼의 깨끗함을 볼 수있는 점이었다. 그의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철저하게 스파르타적이었다. 한 음도 남아도는 음이 없었으며 그의 동료인 베르크에게서 종종 발견할 수 있었던 귀에 무리를 주는 굉음도 없었다.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였던 카잘스는 동시대의 작품보다 고전 작품 연주에 더욱 열중했다.


지독했던 베베른과의 리허설
 밤새도록 기차로 달려 우리는 바르셀로나에도착했다. 리허설은 다음날 아침에 시작됐는데 멀리서 스페인 내전의 첫 포격소리가 들렸다.
 바르셀로나 경험은 협주곡 초연 직전에 물러나야했던 베베른에게는 불운하고 치욕적인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구요? 미리 예상했어야만 하는 많은 문제들이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그중 하나는 오케스트라에 대한 것이다. ISCM 축제 주최측에서는 파블로 카잘스의 오케스트라를 기용했다. 나는 카잘스가 단원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전음악 레퍼토리들을 연주하게 했는지는 모른다. 물론 카잘스 자신은 동시대 음악을 싫어했으며 오케스트라의 성향이 그의 기호에 따라 영향을 받았다.
 그 다음에는 언어의 문제가 있었다. 단원들은 독일어를 이해하지 못했고 베베른은 프랑스어를 전혀 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프랑스어라면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을텐데. 아마도 그들 중 소수는 독일어를 약간은 할 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베른은 런던과 빈, 그리고 아일랜드의 방언이 섞인 그런 독일어를 구사했다. 독일어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목소리가 아주 작고 부드러워서 마치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지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베베른이 리허설을 진행하는 방식에 있었다. 그것은 마치 빈의 쿠르츠만 박사의 집에서 열의에 찬 몇명의 음악가들을 앞에 놓고 베토벤 소나타를 한소절씩 연주하면서 분석하던 그의 레슨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작곡 방식과도 흡사한 것이었다. 그는 즐겨 '모든 음에는 자기 나름대로의 생명력이 있다'는 말을 하곤 했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아주 절제된 음악을 작곡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르셀로나에서도 그는 역시 단원들에게 하나의 동기, 한 소절만을 반복해서 연주함으로써 한 음, 두 음 또는 동시에 세개의 음의 내면에 흐르는 표현과 의미를 느끼도록 호소했으므로 결국 악구에서 두박자 내지 네박자 밖에 연습해보지 못하고 끝내게 됐던 것이다.
 두 번의 리허설을 했지만 우리는 76페이지의 악보에서 6~7페이지밖에 맞춰보지 못했다. 단원들의 요청으로 나는 베베른에게 단원들에게 작품의 전체적인 구조와 복잡한 울림, 전반적인 흐름에 대한 감각을 주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곡을 연주하게 해야 한다고 여러번 되풀이해서 얘기했다. 그러면 그는 항상 그 의견에 찬성했으며 다음 리허설 때에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역시 그에게 '모든 음에는 자기 나름대로의 생명력이 있었다'. 그는 한음 한 음을 소중하게 여겼으며 한 음 한 음을 마치 자신의 호흡인 것처럼 끌어안았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는 마치 환자의 몸에서 단 하나의 힘줄이나 신경이라도 잘못된 상태로 남겨두고서는 수술을 끝마칠 수 없는 양심적인 외과 의사처럼 단 한 음이라도 그 안에 내재된 의미를 모르고서는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30분이상 진행된 마지막 리허설 때에도 아무런 진전이 없이 가중된 혼란과 좌절감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갑자기 베베른이 악보를 움켜쥐더니 극장에서 뛰쳐나갔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호텔에 가보니 그는 방문을 잠그고 있었고 곧 이어서 사라졌다.

베베른을 대신해 베르크의 협주곡을 초연한 쉐르헨


쉐르헨이 대신 지휘한 연주회
 정말 이만저만한 낭패가 아니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때 마침 ISCM의 또 다른 연주를 지휘하러 바르셀로나에 와있던 단호한 성격의 헤르만 쉐르헨이 베베른 대신 지휘하는 것을 허락한 다음에 반전됐다. 베르크 협주곡의 연주 날짜가 바로 다음날로 다가왔는데 쉐르헨은 아직 악보도 보지 못한 상태였고 그날 밤 자신의 연주를 준비하기 위해 할당된 시간에 한시간 반 동안 리허설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감동적인 협주곡 초연이 됐던 것은 바로 '그' 덕분이었다. 음악은 기적적으로 부드럽게 흘렀으며 단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불쌍한 베베른에게는 바르셀로나에서의 일은 굴욕적인 패배였다. 다른 많은 작곡가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테크닉이 없었던 것이다. 쇤베르크는 탁월한 지휘자는 아니었다. 그것은 스트라빈스키도 마찬가지였다. 때때로 사람들은 라흐마니노프는 어쩌면 그렇게도 지휘를 잘 하느냐고 내게 물어온다. 그는 연주자이기 때문이다.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음악을 지휘할 때 그는 작곡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휘자의 눈을 갖고 마치 자신이 차이코프스키 또는 베토벤이 된 입장에서 음악에 접근한다.
 그렇다면 베베른이 빈에서 공연을 성공리에 지휘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는 전적으로 직업적인 오케스트라가 아니었다. 단원들 대부분이 음악원 학생들이거나 아마추어들 또는 열렬한 베베른 숭배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끊임없이 연습했다. 그들을 통제하는 아무런 조직도 없었다. 자신들이 준비가 됐을 때에만 연주할 따름이었다. 따라서 그는 정말로 그들을 지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곳에서 그는 지휘했다기보다는 지도했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런던에서 재기한 베베른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1936년 4월 19일에 초연되었다. 그후 2주일이 채 못되어서 5월 1일에 런던의 BBC 오케스트라로부터 두번째 공연 제의가 들어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베베른이 지휘대에 섰다. 아마도 이 공연 역시 크게 실패로 끝났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공연에서는 경우가 달랐다. 이번 공연은 대단히 감동적인 것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구요? 바르셀로나 초연때 관객 중에는 BBC의 현대음악 책임자인 에드워드 클락이 있었다. 그는 그전에 이미 베베른에게 런던에서 협주곡을 지휘해줄 것을 초청해놓은 상태였고 그가 원하는 만큼의 리허설 기간을 보장할 것을 약속했다. 따라서 베베른이 런던에 왔을 때는 클락이 필요한 제반사항들을 모두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바르셀로나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다. 그들은 '베베른을 지원' 해 주어야 한다는 충고를 들었다. 그리고 물론 그들은 그렇게 했다. 런던의 음악가들은 수준이 달랐다. 현대음악에 친숙한 상태였으며 이전에도 이미 이런 종류의 음악을 연주한 경험이 있었다. 예비 리허설 동안 나는 각 파트의 수석 주자들을 만났다. 그들이 각자의 파트를 맡고 나는 그들을 위해 연주했다. 무대에 설 때쯤에는 그들은 그 곡을 완벽하게 연주할수 있었다. 베베른이 할 일은 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격려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미 그들은그가 원하는 것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단지 그들을 바라보고 있기만 하면 됐다. 그들은 그의 손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의도를 간파해낼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지휘방식은 바르셀로나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케스트라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다. "모든 인간관계중에서 특별히 음악 활동에서는 서로간의 이해와 신뢰를 위해서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같은 이해의 파장을 호흡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 베베른과 BBC 오케스트라 사이에는 이런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들은 항상 그와 이해의 폭을 같이 했다. 일상적으로 흔히 말하는 완벽하게 연주하는 좋은 공연이 아닌 위대한 음악적 경험을 할 수있는 위대한 공연은 바로 이런 지휘자와 단원들 사이의 호흡의 일치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런던에서는 베베른의 말 한마디 한마디, 몸짓 하나 하나의 의미까지도 이해되었으며 애정어린 마음으로부터의 경청의 대상이 되었다.

베르크의 영혼을 불러낸 연주
 공연장의 분위기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정도로 진지했다. 베베른과 오케스트라 단원들, 그리고 나는 모두 무아지경에서 연주했다. 음반(주1) 을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여유있고 사려깊은 연주였다. 그것은 각각의 악구에서 최대한의 의미와 표현미를 끌어내기를 원하는 베베른적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완벽한 베베른 색깔의 음악이었다. 베르크의 협주곡의 음 하나하나는 일생에 걸친 베베른의 신조대로 한음 한음 그 '나름대로의 생명력'이 사려깊고 신중하며 경건하게 되살아났다.
 연주하는 동안 나는 베베른의 꿰뚫는 시선과 그의 충만한 위력 앞에서 점점 뒤로 물러앉게 됐다. 바르셀로나의 비극을 기억하고 있었던 나는오직 그만이 홀로 공연을 주도하기를 희망했다. 이것은 아마도 현명하지 못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음반을 들어보면 독주 부분과 관현악 사이의 불균형을 느낄 수 있는데 내 바이올린이 마이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마이크 같은 것은 아주 잊어버린 상태였다.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나는 수 년전에 쿠르츠만 박사의 집에서 있었던 그 자신과 (나를 포함한) 열렬한 그의 청취자들을 베토벤 음악의 세계로 몰입하게 했던 베베른의 베토벤 소나타 레슨이 생각났다. 그는 이번에는 재창조하는 위력을 통해서 죽은 친구 알반 베르크의 영혼을 불러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이후로 나는 베베른과 원만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이유들 중 하나는 내가 매우 어렸으며 그에게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어리석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단히 많은 작곡가들과 지휘자들과 함께 일했으며 그들 중 몇 명과는 아주 절친한 사이다. 나는 그들을 솔직하고 친절하게 대하고 그에게도 똑같이 했다. 베베른은 나의 이러한 솔직한 성격을 좋아했다. 그는 말끝마다 그에게 굽신거리는 사람보다는 솔직한 사람을 더 좋아했다. 나는 그의 위대한 음악적 지위를 알고 있었지만 굽신거리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말했다. 그리고 그가 내색은 하지 않지만 고민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베르크, 쇤베르크, 베베른은 매우 절친한 사이이며 서로에게 헌신적이었는데 차이점이 생겼다. 어떤 면에서 볼 때 베르크가 심지어 쇤베르크보다도 성공했다. 쇤베르크는 작곡가로서 뿐만 아니라 위대한 선생이자 음악적 명상가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그 당시 베베른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그 자신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내가 베르크에게 협주곡을 의뢰한 것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런던에서 그가 나를 볼때마다 그런 느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침내 내가 그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당신에게 뭔가 다른 것을 원해요. 나는 솔로 소나타를 한곡 부탁합니다." 내가 말했듯이 나는 그를 두려워할 정도로 어리석었으므로 다른 작곡가들에게는 벌써 말한 내용을 이제야 그에게 털어놓고 말했다. “당신의 음악에서는 음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해요. 그래서 계속성에 문제가 있어요. 예를 들어 말하자면 당신은 몇 개의 악기들을 위해서 곡을 써요. 한 연주자가 몇음을 연주하고 다음 연주자에게 넘겨주고, 그 다음 연주자가 몇음 연주하고 다시 다른 연주자에게 넘겨주지요. 이런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처음의 연주자는 그동안 곡의 흐름을 잃어버리게 되고 자신의 연주 순서를 기다리면서 지루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나는 감히 그에게 직설적으로 지적했던 것이다.
 나는 계속 말했다. "4개의 각각 다른 음색을 내는 4대의 솔로 바이올린을 위한 곡을 작곡하려고 하는 겁니까? G, D, A, E 현들은 모두 한대의 바이올린에 속한 음들입니다. 그런 곡을 연주하려고 한다면 그의 바이올린에게는 아주 거대한 곡이 되겠지요 바흐의 샤콘느만큼이나 긴 곡이 될 겁니다." 물론 그는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적절한 지적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과하지 않았다. "내 말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작곡할 필요가 있을 때만 작곡하세요. 그러나 한악기에 고정시키세요. 내말은 어떤 악기는 항상 A음만을 내고 다른 악기는 언제나 E음만을 내라는 얘기가 아니예요. 하지만 당신 식대로 하면 그런 종류의 곡이 되고 말 것예요" 잠시 후 그는 대답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는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곧 그 일을 잊어버렸고 전쟁이 일어나자 우리가 주고 받은 대화는 더이상 쟁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뒤 나는 트렁크에서 베르크 협주곡 음반과 함께 베베른의 편지를 발견했다.
 "친애하는 크라스너에게, 솔로 소나타에 대한 당신의 제의를 생각해보았는데 당신을 위해서 한 곡 작곡하기로 결심했음을 알리오. 나는 지금 피아노 곡을 쓰고 있는데 그 곡을 마치는 대로 당신을 위한 소나타를 작곡하겠소"
 나는 베베른의 자필 악보를 가지고 온 몰덴하우어에게 그것을 찾아보도록 부탁했다. 내가 물었을 때 그와 그의 스태프들은 그들이 아직 일람표를 작성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딘가에 바이올린 솔로 소나타가 있을테니 꼭 찾도록 하세요" 결과야 어떻든지 간에 나는 나의 제의를 수용하고 친절한 마음을 표현한 그 편지를 발견하게 돼서 무척 기뻤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것이 좋은 지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클렘페러가 지휘를 맡은 두번째 베르크 협주곡 연주는 나치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사되었다.


나치가 방해한 클렘페러와의 협연
 빈에서 클렘페러의 지휘로 어렵사리 했던 세번째 베르크 협주곡 연주에 대해 말하기 위해 잠시 베베른에 대한 얘기를 접어두기로 하겠다. 클렘페러는 나치가 세력을 잡은 해인 1933년에 독일을 떠나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그러난 그는 여전히 빈 필하모닉에서 객원지휘자로 있었으며 빈 필하모닉에서 베르크를 연주하고 싶어했다. 그는 BBC와 공연한지 6개월이 채 안된 10월 25일 일요일 아침으로 연주 일정을 잡았다.
 나는 예정된 리허설 시작 날짜보다 1주일 정도 빨리 빈에 도착했다. 리허설이 시작되기 3일전에 갑자기 클렘페러가 베르크 협주곡 공연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고 내게 말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주를 거부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돈다는 것이었다.
 “왜요?"
 “볼셰비키 음악이고 유태인들이 연주하기 때문에."
 그때가 1936년이었고 오케스트라 단원들 대다수가 이미 나치 당원들이었다.
 물론 클렘페러는 말했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거요. 내가 그들과 맞서보겠소. 그들도 연주하지 않을 수 없을 거요."
 그리고나서 바로 베르크 협주곡 공연이 불투명하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바로 다음날 나는 신문에서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빈 필하모닉의 원로 제1바이올린 수석 주자인 아르놀트 로제가 자신이 베르크 협주곡의 관현악 반주를 맡겠다고 발표한 것을 읽었다. 로제는 말러와도 친분이 있고 베르크의 친한 친구였다. 그는 이미 은퇴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며 주요 작품의 연주회에서 연주했으며 결코 협주곡 반주는 하지않았다. 그의 발표는 즉시 단원들의 반발을 막아냈다.
 클렘페러는 만약 그들이 베르크 협주곡 연주를 거부한다면 그는 다시는 빈 필하모닉을 위해서 지휘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전갈을 단원들에게 보냈다고 직접 내게 말했다. 더 나아가 그는 빈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그들이 연주를 거부한 것을 국제사회에 폭로하겠다고 했다. 빈 필하모닉은 단원들이 직접 운영하는 자치단체이다. 오케스트라가 오페라 연주자를 결정하고 자신들의 연주회를 운영한다. 클렘페러가 지휘대에 서자 표가 잘 나가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가 위협하자 굴복했던 것이다.
 문제가 생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결국 연주를 했다. 사실은 나치당원들이 연주회장에 와서 정치적인 시위를 했던 것이다. 상당수의 베르크와 쇤베르크 추종자들도 박수 갈채를 보내며 반대의 시위를 했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우리가 갈채에 답례인사를 하기도 전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우리는 이것을 하기 원하지 않았다" 라는 항의의 표시로 일제히 일어나서 무대에서 사라졌다. 무대에 로제와 클렘페러 그리고 나 이렇게 세사람만을 남겨놓고 말이다.
 수 년후 빈에서 나는 이 사실을 수석 비올라주자로 있는 유태인이 아닌 내친구에게 말했다.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내게 말했다. 그들은 모두 비밀 연락망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나치 당원들처럼 만났다.
 "나도 그들 중 한사람이었어요." 그가 말했다. "내 친구들 모두 1940년까지 열렬한 나치당원으로 남아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인가 나는 빈 교외에 있는 내집 창문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어요. 군대에 의해 빈에 내버려진 수백명의 아이들이 강제수용소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눈내리는 겨울 벌판을 맨발로 걷고 있었어요. 나는 친구에게 내가 본 것을 얘기했고 그 뒤 우리는 그 조직에서 나왔지요."

루이스 크라스너
1903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미국으로이주했다.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공부했으며 유럽과 미국에서 독주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44년 미트로풀로스가 지휘하는 미네아폴리스 심포니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1949년 그가 시라쿠세로 이주할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그곳에서 시라쿠세 심포니의 연주여행에 참여했으며 지방의 실내악 애호가 모임을 조직했다. 1972년까지 대학에서 바이올린과 실내악을 가르쳤다. 1976년 이후로 뉴잉글랜드 음악원과 탱글우드에 있는 버크셔 음악센터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작곡을 의뢰해서 초연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잘 알려졌으며, 또한 일반 베르크의 협주곡을 최초로 녹음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쇤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해서 녹음하기도 했다. 광범위한 분야의 현대음악에 관계했으며, 그가 초연한 현대음악작품으로는 카세라와 세션의 곡, 그리고 코웰과 해리스의 소품들이 있다. 코웰과 해리스에게는 바이올리니스트 자신이 직접 작곡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의 음반목록에는 작곡가가 직접 피아노 반주를 맡았던 피스턴의 소나타와 미트로풀로스가 지휘하는 쇤베르크 세레나데의 바이올린 파트가 포함되어 있다.

(주1) 크라스너는 이 연주를 그가 지금까지 했던 협주곡연주 중에서 가장 아꼈으며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서 BBC로부터 공연 실황 테이프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BBC측은 그 실황 테이프를 갖고 있지 않은척 했다. 그러던 중 1970년대 중반 시라쿠세 대학에서 은퇴한 후에 크라스너는 자신에 대한 주요 기사들을 정리하던 중 우연히 BBC공연의 아세테이트 디스크를 발견했다. 이 음반들은 음향상의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있었으며 면마다 녹음의 질도 차이가 많이 났다. 상당수의 작품들이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녹음을 다시 해야 했다. 마침내 서독 라디오 방송국에서 그것들을 복원해내서 알반 베르크 탄생 100주년기념일인 1965년 2월 9일에 방송했다. 그 작업은 크라스너가 시라쿠세 대학에 재직할 당시 동료로 일했던 음향 엔지니어 리처드 번즈가 맡았는데 그는 Pack-burn 오디오 잡음 억제기의 공동 발명자이기도 하다. 그 이후 번즈는 디스크의 음질을 좀더 향상시켰다. 최근 베베른이 지휘한 다른 공연들과 함께 음반으로 발매하기 위한 협상이 진행중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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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橋幸宏さん死去 YMOなどのドラマー、70歳 - 産経ニュース (sankei.com)

 

高橋幸宏さん死去 YMOなどのドラマー、70歳

3人組音楽グループ「イエロー・マジック・オーケストラ(YMO)」の一員で、世界中に「テクノ音楽」ブームを巻き起こすなどしたドラム奏者の高橋幸宏(たかはし・ゆき…

www.sankei.com

YMO의 드러머를 맡았으며 여러 밴드 및 유닛에서 활약했던
뮤지션 다카하시 유키히로가 타계했다. 향년 70세.
1972년 가토 가즈히코가 이끈 새디스틱 미카 밴드에 참여, 유럽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78년 호소노 하루오미, 사카모토 류이치와 함께 YMO를
결성해서 밴드의 대표곡 'RYDEEN'을 작곡하는 등 세계적인 테크노 붐을
일으켰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얘기는 들은 바 있는데
다카하시 유키히로의 부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네요.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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