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이혼하고서 쓸쓸한 매일을 보내던 중년의 시나리오 작가 하라다는 고향인 도쿄 아사쿠사에서 어릴적 사고로 세상을 뜬, 이제는 자신의 나이보다 젊은 모습의 부모님과 만나게 된다.
당황해서 아버지를 보자 아버지의 가슴 언저리가 이미 사라져만 간다. 이렇게 이별인 것인가. 이런 식으로 떠나는 것인가. 놀란 나머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아무 말도 말거라.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거라' 아버지가 말했다 '너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단다.' 어머니가 말했다. '그럼. 자신을 괴롭게 하지 말거라. 자기가 자신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누가 소중히 하겠어.' -소설 '이방인과 보낸 여름' 중에서...
작가 야마다 다이치 이 소설의 영화화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연출하는 방법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이미 이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다 쏟아내 버렸다. 게다가 영화로 만든다고 해도, 소설의 세계를 크게 확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약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매력이 작품 속에 가득 담겨 있지 않으면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원작에 머무르고, 그 이상의 것은 각각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시나리오를 맡을 사람은 이치카와 모리이치 씨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치카와 씨는 비현실적인 세계를 독특하게 개척한 작가로, 그가 내 비현실의 세계를 멋지게 요리해준다면, 내가 직접 쓰는 것보다 훨씬 흥미로운 작품이 될 게 틀림없다. 연출도 마찬가지로, 오바야시 씨는 또 하나의 놀라운 비현실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그의 독자적인 세계가 내 소설의 세계와 부딪친다면 결코 순조롭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자신을 과시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같은 노래라도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놀라울 만큼 다른 매력이 드러나는 것처럼, 분명 내 작품과는 또 다른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그저 내 작품을 내어놓고, 두근거리며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다.
영화감독 오바야시 노부히코 살아간다는 것의 용기와,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감사함을. 달콤한 추억을 품은 채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도 있다. 이 삶에 깊은 절망을 느끼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혹은 일상의 관성 속에서 깨닫지 못한 채, 살아 있으면서 이미 죽어 있는 사람도 있다. 죽음이란 슬프고, 괴롭고, 때로는 무의미한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살아간다는 일은 훨씬 어려운 것이다. 슬픔과 고통, 무의미함을 모두 스스로 짊어지고 계속 살아가려면, 참으로 큰 용기가 필요하다. 각오도 필요하다. 그 소중한 마음을 죽은 이들에 대한 감사함으로 표현해낸 것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지혜가 담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때로는 두려운 장면도 있지만, 그것은 삶과 죽음을 가볍게 다루는 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일 것이다. 야마다 씨의 용기, 이치카와 씨의 각오를 이어받아, 나는 가능한 한 성실하게 이 중요한 주제를 관객 여러분께 전하고자 한다. 그것이 이 겉치레뿐인 ‘상냥함의 시대’에 대한 작은 경종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그것이 이 시대를 계속 살아가는, 작은 용기의 증거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