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시 마사키 x 시노다 마사히로 인터뷰 1993 [일본감독협회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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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다: 1959년부터 인간의 조건이 등장하는데... 나카다이 다츠야 씨를 만나게 되었고 고바야시 감독 자신의 전쟁체험, 어쩌면 광산에서의 경험도, 전쟁포로 체험도 전부 주연인 나카다이 다츠야 씨와 함께 5년간 만들게 됩니다.
이때 촬영감독도 바꼈죠? 미야지마 요시오 씨죠...

고바야시: 인간의 조건은 독립 프로덕션인 닌진 클럽에서 처음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그런 관계로 인해서 촬영감독이 오후나 촬영소(쇼치쿠 영화사)와 계약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곤란했어요. 그럼 일본 제일 촬영감독을 쓰자고 해서 미야지마 씨에게 부탁했지요.

시노다: 미야지마 씨의 작품을 그때까지 보고서 특별히 선택하게 만든 영화가 있나요?

고바야시: 네, '전쟁과 평화'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시노다: 카메이 후미오 씨의 영화죠?

고바야시: 네... 그리고 토호에서 촬영한 영화는 대부분 봤습니다.

시노다: 미야지마 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쇼치쿠에서 카메라 설치를 할 때 보통의 고정된 카메라 삼각대가 아닌 트라이포드를 썼다고 하더군요. 삼각대로는 미묘한 높이 조절이 어려운데 트라이포드로는 정밀하게 높이며 각도 조절이 가능하잖아요. 수평앵글도 아주 정확하게 조정이 가능하죠. 그런 엄밀함이 쇼치쿠 영화에는 보기 드문 것이죠. [웃음]

고바야시: 트래킹 숏이나 팬 숏을 찍을 때 때때로 흔들림을 이용할 때도 있더군요. 꼭 필요하다 싶을 때 감각적으로 활용하더군요. 아마 그래서 트라이포드를 이용했을 겁니다.

시노다: 그런 엄밀함이 감독님의 기질과 맞았던 것이군요?

고바야시: 원컷을 찍는다고 하면 감독으로서 염두에 둔 게 있겠죠. 러시를 봅니다. 그런데 훨씬 좋습니다. 현장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좋아요. 현장에서는 쓸데없는 게 끼어들기 마련입니다. 그런 걸 모두 제거하고 확실히 화면에 담아냅니다. 역시 필름에 담긴 것이 영화의 이미지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미야지마 씨를 만난 후부터 현장에서보다 좋은 이미지를 필름에 담아낼 수 없다는 촬영감독은 믿지 않게 되었어요.

시노다: 나카다이 다츠야, 미야지마 씨와 함께 작업한 이 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군요?

고바야시: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지만 할 때는 그런 느낌은 없었죠. [웃음]

시노다: 인간의 조건을 힘들게 작업하신 것으로 압니다만...

고바야시: 1부, 2부는 굉장히 힘들었어요. 홋카이도의 로케이션 장소에서 돌아왔을 때 아직도 세트 촬영이 3/5 정도가 남아있었어요. 11월에 돌아왔는데 12월이 다 지나가서도 끝내지 못했어요. 겨우 끝낸게 30일이었나...
그때까지 쌓아놨던 러시필름을 연말에 보기 시작해서 새벽 5시까지 모두 봐야만 했어요. 대부분 처음 본 러시였어요. 공개일이 1월 15일이었어요. 그때까지 편집하고 더빙까지 마치는게 불가능했죠. 촬영도 이전달부터 하루 네시간 밖에 못 자면서 진행한 것인데 그것이 후반작업까지 이어진 것이죠. 편집을 담당한 우라오카 씨가 신입이었는데 그 사람은 체력이 있으니 어떻게 하겠지 싶어서 맡긴 거죠. 나 역시 그 옆에 앉아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체력적인 문제로 그럴 수가 없게 된거죠. 우라오카 씨가 굉장히 힘들었죠. 하지만 맡겨둔 것이 그에게 자신감을 줬습니다. 졸기만 하면 내가 골프채로 마구 두드리면서 깨웠지요. [웃음] 연말 자정부터 러시를 보기 시작해서 아침 5시에 마쳤어요.

시노다: 밤을 새셨군요.

고바야시: 절반은 이전에 봤지만 절반은 남아있었던거죠. 아침 5시에 모두 저희집으로 데려갔어요. 닭국을 해놨는데 그걸 먹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까 의논했어요. 지금도 그때의  닭국 맛을 이야기 하더군요. 무척 지쳐있었을텐데...

시노다: 큰 일을 끝냈다는 느낌이 드네요

고바야시: 다만 시간이 없었어요. 편집 시간도, 필름 세척 시간도... 그래서 상당량을 잘라냈어요.

시노다: 최근 완전복원판이라는게 나왔는데요.

고바야시: 사실 아니에요. 아웃테이크를 찾으려고 애는 썼는데 모두 사라져 버렸더군요. 어쨌든 포스트프로덕션이 끝나고 동독에서 베를린 앙상블이 일본에 왔어요. '세 자매'라는 작품을 공연했을 거예요.

시노다: 체홉의 작품이죠?

고바야시: 네... 체홉의... 바로 이 극장에서 한다고, 이건 봐두면 좋다고 사토 마사유키 씨가 표를 주더군요. 아내와 아마 저 쪽 자리였을 거예요. 공연 내내 자고 말았죠. [웃음] 쿨쿨 잤던 모양이에요. 아내는 계속 깨우려고 애쓰고...

시노다: 하하

고바야시: 꼭 봐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피곤해서 못 견디겠더군요.

시노다: 그런 에피소드가 있는 '인간의 조건'인데 쇼치쿠 영화사로서는 처음으로 국제영화제,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이잖습니까. 산 죠르지오 상을 수상하셨지요. 국제적인 성과를 얻었는데...

고바야시: 아마 3부, 4부를 찍을 때 그 소식을 들었을 거예요.

시노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전쟁영화가 있지만 완성도나 메시지 전달면에서 피크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고바야시: 처음 나왔을 때는 상당히 평가가 나빴어요.

시노다: 정말입니까?

고바야시: 카지라는 인물이 너무 미성숙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예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성장하는 인물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깨닫지 못한게 아닌가 싶어요. 1부, 2부에서 이런 장면이 있어요. 아라타마 씨가 처형장에 가는 나카다이 씨를 막으려는 장면이죠. 그 장면이 3분 정도의 길이였나... 더 길었었나 그랬는데 그 장면을 찍을 때 후지타 감독을 중심으로 자이언츠 팀이 촬영세트를 보러 왔어요.

시노다: 야구의 교진 팀 말이죠?

고바야시: 네... 그 장면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나카다이 씨가 일어나고 카메라는 그의 움직임을 트래킹하면서 3분 정도. 그 장면을 끝냈을 때 무릎 위로 눈물이 떨어졌어요. 미야지마 씨가 흘린 눈물이었어요. [웃음]

시노다: 마음 속 깊은 뜨거운 눈물이라고 하는 것이겠죠

고바야시: 그 정도로 미야지마 씨도 그 장면을 역시 좋아했던 듯 싶어요. 교진 팀의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죠. '와... 영화 만드는 게 굉장히 힘든 일이군요' [웃음] 미야지마 씨에 관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는데 소비에트 병사에게 여인이 강간을 당하고 트럭에서 내던져지는 장면이 있어요. 일본인 피난민이 몰려들면서 그녀를 둘러쌉니다. 트럭이 장면에 들어서면서 피난민을 이리저리 내쫓아 버리고 여인을 또 내던집니다. 이 장면을 어떻게 찍을지 제 나름의 구상이 있었어요. 그런데 미야지마 씨는 공산주의자여서...

시노다: 소비에트의... [웃음]

고바야시: 그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는 롱 샷으로 처리를 하게 되었어요. 그랬더니 미야지마 씨가 그러더군요. '이 장면은 조금 더 클로즈샷으로 해야겠어요' [웃음]

시노다: 그랬나요? [웃음]

고바야시: 그것에 감격했어요. 미야지마 씨는 리허설을 지켜보면서 카메라를 어디에 놓을지 정했어요. 때로는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위치가 나오기도 하죠. 그러면 얘기를 하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카메라 위치를 조금씩 조정합니다.

시노다: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요?

고바야시: 네... 결국엔 제가 생각했던 정확한 위치에 카메라를 놓습니다. 다른 감독들은 그 사람에게 바로 말해버리곤 하죠.

시노다: 아... 그럼...

고바야시: 그렇죠. 자기 프라이드에 상처를 받을 수도 있는 거지요. 물론 그런 애같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미야지마 씨와 원활하게 작업하는 법을 알았습니다.

시노다: 미야지마 씨는 무척 엄밀한... 기술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그런 분이어서 진짜 남자다운 분이었죠. 항상 게다를 신고 계셨고요. 고바야시 감독님은 언제나 댄디한 옷차림이었지요. 그래서 항상 두 분이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하셨는지 신기하게 보기도 했습니다.

고바야시: 저는 근본적으로 오후나(쇼치쿠)의 시스템에서 배우며 자랐는데 그 곳은 감독에게 전권을 주었지요. 하지만 독립프로덕션에서 '인간의 조건'을 만들면서 처음으로 영화는 스태프 전원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런 인식을 한 순간부터 제 영화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노다: 기노시타 씨나 오즈 선생 처럼 감독 시스템의 정점에 있는 분들이 만든 영화에서는 사람들이 감독의 매 번의 움직임을 보고서 일을 했었지요.

고바야시: 저에겐 또 처음이었던 게 뭐냐고 하면... 오후나(쇼치쿠)의 감독들은 기본적으로 콘티를 만들지 않아요.

시노다: 그렇지요.

고바야시: 특히 기노시타 감독의 경우를 보자면 현장에서 움직여보면서 바로 장면을 구상합니다. 하지만 미야지마 씨와 일하면서 처음으로 콘티라는 걸 만들어 봤습니다.

시노다: 그 전까지 콘티를 만드신 적이 없었나요?

고바야시: 거의 없었죠. 만든 콘티를 미야지마 씨에게 전해주죠. 인상 깊었던 게 그 사람은 다른 이의 아이디어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맨 밑에 있는 스태프가 낸 아이디어라도 자기가 생각해낸 아이디어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겼어요. 내가 생각해낸 콘티를 정말 꼼꼼이 읽었어요. 그 사람 나름의 이 장면은 이렇게 하면 어떤가... 조명은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조명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어디로 할지 등등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그 정도로 다른 사람이 내놓은 아이디어를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 상당히 놀랐어요.

시노다: 오후나의 감독들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배우들의 분위기를 능숙하게 잡아 이끌어냈었지요. 시마즈 야스지로 적인 연기지도론 같은 것이었죠. 콘티를 사용한 건 오즈 감독 밖엔 없었던 듯 싶은데요.

고바야시: 오즈 감독도 그 시절에는 사용하진 않았을 겁니다.

시노다: 오즈 감독의 대본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고바야시: 분명 전후 시기부터 콘티를 썼을 겁니다.

시노다: 그렇다면 아마 '만춘'부터이지 않을까 싶네요. 이 앵글은 빨간 펜, 반대는 파란 펜, 클로즈업은 다른 식으로 표기를 했었지요.

고바야시: 제 생각에 오즈 감독은 콘티 만드는 걸 즐기지 않았을까 싶어요. [웃음]

시노다: 색깔 별로 연필을 다 쓰면서 말이죠.

고바야시: 그런 느낌이 오네요. [웃음] 그 사람은 예전부터 정말 변하지 않았으니깐...

시노다: 영화도 말하자면 그렇지요... [웃음]

고바야시: 그래서 콘티 만드는 걸 즐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뭘 그리는 걸 좋아했었지요.

시노다: 미혼으로 계셨기도 했고요. [웃음] 미야지마 촬영감독은 고바야시 감독 건너편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산과 같은 분인데 이 분과 협업하기 시작하면서 콘티라는 게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네요.

고바야시: 그래요. 그리고 스태프 전원에게 내 아이디어를 이해시키는 방법이기도 했지요. 전원이 다음 장면이 어떻게 찍힐지 안다는 것이 큰 차이를 만들어냈다고 봅니다.

시노다: 저도 독립프로덕션 회사를 차리면서 콘티 없이는 절대로 촬영 시작을 하지 않았어요.

고바야시: 예전 감독들은 그랬잖아요...

시노다: 아무 얘기도 안 해주죠.

고바야시: 감독이 '오늘은 21씬을 찍습니다'라고 말은 하지만 스태프 누구도 어떤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어요. [웃음] 스태프들은 모른 채로 하는 걸 좋아했지요.

시노다: 조감독들은 감독이 어떤 걸 생각하지 빨리 알아차려야만 했지요.

고바야시: 조감독들을 굉장히 힘들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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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avaop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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