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코드리뷰 1994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안톤 베베른과 베르크,1930년대 빈에 대한 추억

글 / 루이스 크라스너

1930년대의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과 나치주의의 발흥 등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가지 새로운 문화를 낳았고, 음악에서도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으로 대표되는 소위 '빈 학파' 라는 새로운 음악운동을 탄생시켰다. 이들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바이올리니스트 루이스 크라스너는 2회로 연재되는 이 글에서 당시의 혼란했던 사회상과 여러 작곡가, 연주가들의 뒷얘기들을 들려준다.

귀족 출신의 작곡가 베베른
안톤 베베른은 작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마르고 강단있는 사람이었다. 좁은 얼굴에 뚜렷한 윤곽의 소유자였으며 눈은 부드럽지만 한번에 상대를 꿰뚫는 듯했다. 외모로 보아 그는 강해 보인다기보다는 유순한 인상이었으며 말이 없지만 정중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자신이 귀족의 혈통임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는 수세기동안 작위를 이어온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비록 내가 그를 알고 있었던 동안에는 결코 '폰' 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내 생각에는 그런 경향이 그후 히틀러 시기에 종종 활자로 표면화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는 종종 생각에 몰두해서 마음이 사고의 한 켠에 빠져있기도 했다. 독일 문화의 우월성과 그들에게 부여된 역사적인 역할 수행에 대한 그의 믿음은 대단히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물론 그러한 생각들이 그를 사고의 심연으로 이끌었다.
1930년대초 나는 젊은 작곡가들과 빈에 있는 쇤베르크 서클과 친분이 있는 다른 음악가들을 통해서 베베른을 몇차례 만났다. 때때로 연주회를 마치고 자리를 옮길 때 그들이 자주 가는 카페 박물관에 있는 '슈탐플라츠', 혹은 프란치슈카너 켈러 근처에서 열리는 모임에 베베른과 함께 초대받기도 했다.

베베른은 친구 베르크의 협주곡 초연의 지휘를 맡겠다고 자청했다.



베토벤과 함께 작곡하는 것 같았던 베베른의 레슨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추억속에서 나를 들뜨게 하는 심오한 음악적 경험은 베베른이 피아니스트이자 반주자인 나의 친구 리타 쿠르츠만 박사와 그녀의 남편 루돌프의 집에서 초대받은 몇명의 음악가들에게 했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레슨이었다. 이것은 내게는 음악의 계시와도 같았다.
 베베른은 피아노 소나타 한두 소절을 연주하고는 아주 상세하게 각 소절의 모티프와 음악을 분석하곤 했다. 그는 음악적 내용의 가장 은밀한 내면의 표현, 각각의 부소절들의 의미와 관계, 각각의 단계들의 필연성들따위를 찾아내곤 했다. 그의 몸짓은 조각과도 같았고 그들은 공기중에 떠도는 그의 메시지들을 형상화하려는 듯했다. 조용한 목소리는 때로 주춤거리기도 했지만 언제나 대단히 표현력이 넘쳤으며 정감있었다. 감상자들은 방의 출입구에 조용하게 앉아있었고 나에게 그 레슨은 매우 감동적이었으며 거의 신비에 가까운 경험이었다. 베베른은 마치 지금 베토벤과 함께 소나타를 다시 작곡하는것처럼 보였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베르크 바이올린 협주곡의 초연
 알다시피 나는 1930년대 초에 베베른의 친한친구이자 동료인 알반 베르크에게 바이올린 협주곡을 의뢰했는데 그는 그 곡을 1935년 봄에 6주에 걸쳐 작곡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 작품의 관현악 연주를 듣지 못하고 불행하게도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쉰 살의 나이로 죽었다.
 2주 후인 1936년 1월 미국에 있는 나에게 빈국제 현대음악 협회(ISCM) 로부터 전보가 왔는데 그 해 4월 19일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ISCM 축제에 그 곡을 선보이기 위해 원래는 1년 뒤로 잡혀있던 그 곡의 초연 날짜를앞당겨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곧 이어서 베베른으로부터 베르크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자신이 직접 지휘를 맡고 싶기때문에 나에게 그 일이 추진되도록 힘써달라는 내용의 편지가 왔다. 물론 나는 베베른의 요청에 따라 그 제안에 찬성했다. 나는 베르크의 새로운 작품을 연구하고 서로 호흡을 맞춰보기 위해 바르셀로나 축제의 리허설 날짜보다 미리 빈에 도착했다.
 그러나 무언가 일이 잘못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빈에 도착했을 때 ISCM 위원회는 긴급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참석자는 에른스트 크레네크, 폴 피스크, 빌리 라이흐를 비롯해서 그밖에도 두세 명의 사람들이 더 있었다. 회의장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사태를 직감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실망스러웠다.
 누군가 내게 말했다.
 "방금 베베른이 지휘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왜요?"
“단지 하지 않겠다고만 합니다. 당신이라도 그를 데리고 올 수는 없을 겁니다. 그에게 연락이 되지 않아요 그는 어느 누구도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말했다.
"나를 그의 집에 데려다 주시오. 이유라도 알아야 할 것 아니오"
"안 됩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들은 계속 걱정하기 시작했다.
"어디에 가서 지휘자를 구한단 말인가? 어니스트 앤서멧이 해줄까? 누가 우릴 위해 지휘봉을 잡겠는가? 우리는 돈도 없는데.”
나는 말했다.
“만약 당신들이 다른 지휘자를 찾는다면 바이올리니스트도 찾아봐야 할 것이오. 내 조건은 오직 베베른과 함께 공연할 때만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오."
물론 그들은 말했다.
"크라스너,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나를 베베른에게 데려다 주시오"
그래서 나는 갔다.
나는 베베른을 위해서 협주곡을 연습해왔고 그것은 내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작품에는 알레그로에서 알레그로로, 또 6/8박자에서 4/8박자로 변하는 따위의 리듬이 복잡한 부분이 몇 군데 있었는데 그렇게 연주하기 어려운 부분이 나올 때마다 나는 그에게 묻곤 했다.
"우리가 정말로 이것을 해야만 됩니까? 정말 저 부분을 연주해야만 하나요?"
 확신하건대 그럴 때마다 그는 이러한 여러가지 문제들에 해결점을 제시하곤 했다.
그는 그 곳에 앉아서 지휘했다. 우리가 네번 맞춰보고 난 후에 나는 그에게 물었다.
"베베른, '정말로' 하기 싫은 겁니까?"
“하고 싶어요”
그는 시인했고 바르셀로나행을 승낙했다.
 그러나 스페인행을 결정하기는 했지만 그는 독일을 경유해서 갈 것을 고집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빈에서 바르셀로나로 갈 때는 스위스를 통과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굳이 독일을 들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이미 그렇게 가는 티켓을 사놓은 형편이었다. 사실 베르크의 미망인과 빌리 라이흐가 2, 3일 뒤에 우리를 따라왔는데 그들도 스위스를 거쳐서 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고집을 부렸다.
 "가겠소. 그러나 조건이 있소 독일을 거쳐서 가야 하고 당신도 나와 동행해야만 하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기로 쾌히 승낙했다. 그가 마음을 돌렸다는 것만으로 너무나 기뻤기 때문이다.

베베른과의 기차여행
 기차에는 거의 손님이 없어서 객실에 우리 둘밖에 없었다. 뮌헨에 도착하자 그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 밖으로 나가서 맥주나 한잔 합시다. 내가 사지요"
 그런데 이것은 그에게 드문 일이었다. 내성적이고 수줍어하는 성격의 그는 놀기 좋아하는 애주가가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와서 식탁이 수백개는 족히 됨직한 기차역에 있는 커다란 식당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한명도 없었다. 재빨리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 앞에 웨이터가 발꿈치를 까딱거리며 서있었다. 베베른은 말했다.
 “진짜 바바리아 흑맥주 큰 걸로 두 잔 주세요.”
 잠시 후 주문한 맥주가 나왔다. 내가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맥주를 마셨다. 베베른은 자기가 술값을 내겠다고 고집했고 15분 뒤에 우리는 기차의 객실로 돌아왔다.
 기차가 출발했고 스위스 국경선까지 가는 데 반시간 정도 걸렸으며 국경선을 넘었다. 베베른이 나를 돌아보며 독일어로 말했다.
“누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하던가요? 당신에게 해를 입힌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알다시피 그때 우리는 독일에서는 유태인들을 모두 거리에서 잡아가고 있으며 경찰이 연행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씌어진 외국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걸 보고난 베베른이 말했다.
 "이제 이걸로 우리가 그 동안 들었던 독일에 관한 모든 과장된 기사들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셈이 되는 거요. 모두 다 왜곡된 선전이란 말이오!"
 이런 순진한 사람 같으니라구. 그 기차는 국제 칸이었으며 그런 말을 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관점을 주장하기 위해 여전히 그 사건을 예로 들었다.
 우리는 정치적인 관점에 대한 장시간에 걸친 토론에 들어갔다. 그는 전에도 그것들을 내게 설명했던 적이 있었다. 이제 그는 20시간 이상가야하는 긴 여행길의 동반자인 나에게 친밀한 대화로 밤을 보내는 비좁은 기차 객실에서 그것들에 대해 대단히 자세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지경에 빠진 현재의 타락한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수한 옛 독일 문명뿐이란 말이오."

12음 기법의 창시자 쇤베르크는 빈 악파를 탄생시킨 작곡가이다.


히틀러를 지지한 베베른
알려져있듯이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사회적으로 혼란한 상태였다. 이 나라는 베트남전 당시의 미국과 흡사한 상황이었다. 학생들이 캠퍼스를 장악하고 농성하고 무장한 시위군중들이 경찰과 대치했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 어느 때까지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것이며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지 모두들 궁금해했다. 지금 중부 유럽에 바로 그런 종류의 기류가 흐르고 있는데 단지 사태가 좀더 나쁘다는 것만 다르다. 이곳에는 어느 정도 조절하려는 기운이 있지만 빈에는 전혀 그런 분위기가 없다. 젊은이들의 태도는 너무나도 냉소적이며 카페와 거리에서의 그들의 행동은 나이든 세대가 보기에는 정말로 걱정스러울 따름이다. 베베른 같은 사람들은 세계가 길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그처럼 훈련과 수양도 없는 급진주의자들의 집단 처럼 되어 버렸다. 그들은 하기를 어떤 단호한 독자만이 그 사회의 산재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며 서양의 인도주의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 베베른에게 “왜 하필 히틀러 같은 사람이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의 대답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는 말할 것이다. "우리가 읽었던 이런 잔악한 짓들이 실제 상황인지 누가 아느냐? 내가 아는 한 그것은 중상모략이다!"
 “베베른, 쇤베르크를 비롯해서 당신의 친구들은 전부 유태인들인데도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견해를 따를 수 있단 말이요?" 어떻게 유태인 문제에 대한 결론을 이렇게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많은 유태인들이 동유럽-폴란드, 러시아, 루마니아-으로부터 이동하고 있으며 곤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참사와 부패한 상황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유태인들이 동유럽에서 급진적인 이념들과 함께 이동해왔다고 그 재앙의 원인을 유태인들의 탓으로 돌린다. 사람들은 유태인들을 구두쇠라고 비난한다. 유태인들은 동유럽에서 빈손으로 이동해온 가난에 찌든 사람들인 동시에 모든것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돈을 가진 자본가들이기도 했다. 어느 쪽인가?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쇤베르크도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것을 밝혀야만 하겠다. "심지어 쇤베르크도 그가 유태인이 아니었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랐을텐데."
 이것이 1936년의 일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베베른이 그의 직업적인 생활과 가족 사이에 끼어 심한 갈등을 느꼈던 듯했다. 그는 가족들에게 헌신적이었으며 그들을 매우 사랑했다. 언제나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뫼들링에서 딸과 사위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들 부부는 적어도 독일 · 오스트리아 합병 전까지는 히틀러를 위해 일하는 은밀한 나치 지지자들이었다.
 그러나 음악활동을 위해서 도시로 오면 그는 다른 세계로 통하는 또 하나의 벽을 건너야만 했다. 그의 음악적인 활동은 전적으로 그의 가족들과는 정반대의 이데올로기를 지닌 친구들에 의해서 지원받고 있었다. 1920년대와 30년대초 빈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 지배되었다. 급진적 사상의 이들 사회주의자들 때문에 때로는 '붉은 빈' 이라고불리기도 했다. 베베른의 친한 친구들은 대부분 이러한 좌파사람들이거나 유태인들이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들 중 한사람인 데이비드 조지프 바흐는 사회주의 정부의 문화적 지도자였다. 베베른에게 연주회를 열어주었던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뿐이었다. 그는 정기적으로시 정부가 지원하는 합창단을지휘했으며 또 사회주의 정부가 후원하는 '노동자들의 오케스트라' 라고 불리는 관현악단과 공연하기도 했으며 좋은 공연을하기 위해 그가 원하는 만큼 리허설을 가질 수도 있었다.
 1934년까지 이런 상태가 계속됐다. 그러던중 내전이 일어나 상황이 복잡하게 변했는데 실제로 내전 기간중에는 대포가 사용되기도 했으며 총격전이 있었고 사상자가 생겼다. 사회주의자들이 패해서 사회당은 불법단체가 됐다. 파시스트 국민정부가 설립됐으며 예상했던 바대로 이정부는 나치 집단의 압력에도 끄덕없이 잘 견뎌낼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원주민이라는 사실만 제외하고는 이데올로기 자체는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후 사회주의 정부의 후원을 받던 예술가들은 하루 아침에 거리로 내몰렸다. 어떠한 공연도 후원을 받지 못했다. 베베른의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아서 잠시동안 미국의 퀘이커 교도들이 궁핍한 음악가들에게 음식을 보내주었으며 절박한 상황에 처한 그들을 도왔다.

이상주의에의 매몰
 장시간에 걸친 기차 여행 중에 슈슈니크 수상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파시스트 정부를 지나쳐왔다. 베베른은 그 정부를 반대했으며 나치 하에서의 생활이 더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 모든 것이 밝혀지고 그 다음에 나치주의의 정당성이 드러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히틀러의 도래 이후 이 위대한 독일 문화는 계승될 것이며 사회가 재건될 것이다. 물론 그후 그는 소위 말하는 나치주의의 정당성의 정체를 알게됐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것에 빠져있었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되기를 희망했다. 그를 변호하기 위해서 나는 그가 때로는 학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순진하고 이상주의자인 성향의 소유자라는 것을 덧붙여야만 한다. 그는 13, 14세기의 독일 고음악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것들에 푹 빠져 있었다. 뮌헨 기차역 사건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천진난만한 점이 있었다. 한편으로 볼때 이런 점들이 그를 가족들의 정치적 · 개인적인 압력에 쉽게 넘어가게 했던 것이다. 다른 면에서는 이것은 그의 영혼의 깨끗함을 볼 수있는 점이었다. 그의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철저하게 스파르타적이었다. 한 음도 남아도는 음이 없었으며 그의 동료인 베르크에게서 종종 발견할 수 있었던 귀에 무리를 주는 굉음도 없었다.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였던 카잘스는 동시대의 작품보다 고전 작품 연주에 더욱 열중했다.


지독했던 베베른과의 리허설
 밤새도록 기차로 달려 우리는 바르셀로나에도착했다. 리허설은 다음날 아침에 시작됐는데 멀리서 스페인 내전의 첫 포격소리가 들렸다.
 바르셀로나 경험은 협주곡 초연 직전에 물러나야했던 베베른에게는 불운하고 치욕적인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구요? 미리 예상했어야만 하는 많은 문제들이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그중 하나는 오케스트라에 대한 것이다. ISCM 축제 주최측에서는 파블로 카잘스의 오케스트라를 기용했다. 나는 카잘스가 단원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전음악 레퍼토리들을 연주하게 했는지는 모른다. 물론 카잘스 자신은 동시대 음악을 싫어했으며 오케스트라의 성향이 그의 기호에 따라 영향을 받았다.
 그 다음에는 언어의 문제가 있었다. 단원들은 독일어를 이해하지 못했고 베베른은 프랑스어를 전혀 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프랑스어라면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을텐데. 아마도 그들 중 소수는 독일어를 약간은 할 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베른은 런던과 빈, 그리고 아일랜드의 방언이 섞인 그런 독일어를 구사했다. 독일어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목소리가 아주 작고 부드러워서 마치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지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베베른이 리허설을 진행하는 방식에 있었다. 그것은 마치 빈의 쿠르츠만 박사의 집에서 열의에 찬 몇명의 음악가들을 앞에 놓고 베토벤 소나타를 한소절씩 연주하면서 분석하던 그의 레슨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작곡 방식과도 흡사한 것이었다. 그는 즐겨 '모든 음에는 자기 나름대로의 생명력이 있다'는 말을 하곤 했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아주 절제된 음악을 작곡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르셀로나에서도 그는 역시 단원들에게 하나의 동기, 한 소절만을 반복해서 연주함으로써 한 음, 두 음 또는 동시에 세개의 음의 내면에 흐르는 표현과 의미를 느끼도록 호소했으므로 결국 악구에서 두박자 내지 네박자 밖에 연습해보지 못하고 끝내게 됐던 것이다.
 두 번의 리허설을 했지만 우리는 76페이지의 악보에서 6~7페이지밖에 맞춰보지 못했다. 단원들의 요청으로 나는 베베른에게 단원들에게 작품의 전체적인 구조와 복잡한 울림, 전반적인 흐름에 대한 감각을 주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곡을 연주하게 해야 한다고 여러번 되풀이해서 얘기했다. 그러면 그는 항상 그 의견에 찬성했으며 다음 리허설 때에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역시 그에게 '모든 음에는 자기 나름대로의 생명력이 있었다'. 그는 한음 한 음을 소중하게 여겼으며 한 음 한 음을 마치 자신의 호흡인 것처럼 끌어안았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는 마치 환자의 몸에서 단 하나의 힘줄이나 신경이라도 잘못된 상태로 남겨두고서는 수술을 끝마칠 수 없는 양심적인 외과 의사처럼 단 한 음이라도 그 안에 내재된 의미를 모르고서는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30분이상 진행된 마지막 리허설 때에도 아무런 진전이 없이 가중된 혼란과 좌절감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갑자기 베베른이 악보를 움켜쥐더니 극장에서 뛰쳐나갔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호텔에 가보니 그는 방문을 잠그고 있었고 곧 이어서 사라졌다.

베베른을 대신해 베르크의 협주곡을 초연한 쉐르헨


쉐르헨이 대신 지휘한 연주회
 정말 이만저만한 낭패가 아니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때 마침 ISCM의 또 다른 연주를 지휘하러 바르셀로나에 와있던 단호한 성격의 헤르만 쉐르헨이 베베른 대신 지휘하는 것을 허락한 다음에 반전됐다. 베르크 협주곡의 연주 날짜가 바로 다음날로 다가왔는데 쉐르헨은 아직 악보도 보지 못한 상태였고 그날 밤 자신의 연주를 준비하기 위해 할당된 시간에 한시간 반 동안 리허설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감동적인 협주곡 초연이 됐던 것은 바로 '그' 덕분이었다. 음악은 기적적으로 부드럽게 흘렀으며 단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불쌍한 베베른에게는 바르셀로나에서의 일은 굴욕적인 패배였다. 다른 많은 작곡가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테크닉이 없었던 것이다. 쇤베르크는 탁월한 지휘자는 아니었다. 그것은 스트라빈스키도 마찬가지였다. 때때로 사람들은 라흐마니노프는 어쩌면 그렇게도 지휘를 잘 하느냐고 내게 물어온다. 그는 연주자이기 때문이다.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음악을 지휘할 때 그는 작곡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휘자의 눈을 갖고 마치 자신이 차이코프스키 또는 베토벤이 된 입장에서 음악에 접근한다.
 그렇다면 베베른이 빈에서 공연을 성공리에 지휘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는 전적으로 직업적인 오케스트라가 아니었다. 단원들 대부분이 음악원 학생들이거나 아마추어들 또는 열렬한 베베른 숭배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끊임없이 연습했다. 그들을 통제하는 아무런 조직도 없었다. 자신들이 준비가 됐을 때에만 연주할 따름이었다. 따라서 그는 정말로 그들을 지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곳에서 그는 지휘했다기보다는 지도했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런던에서 재기한 베베른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1936년 4월 19일에 초연되었다. 그후 2주일이 채 못되어서 5월 1일에 런던의 BBC 오케스트라로부터 두번째 공연 제의가 들어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베베른이 지휘대에 섰다. 아마도 이 공연 역시 크게 실패로 끝났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공연에서는 경우가 달랐다. 이번 공연은 대단히 감동적인 것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구요? 바르셀로나 초연때 관객 중에는 BBC의 현대음악 책임자인 에드워드 클락이 있었다. 그는 그전에 이미 베베른에게 런던에서 협주곡을 지휘해줄 것을 초청해놓은 상태였고 그가 원하는 만큼의 리허설 기간을 보장할 것을 약속했다. 따라서 베베른이 런던에 왔을 때는 클락이 필요한 제반사항들을 모두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바르셀로나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다. 그들은 '베베른을 지원' 해 주어야 한다는 충고를 들었다. 그리고 물론 그들은 그렇게 했다. 런던의 음악가들은 수준이 달랐다. 현대음악에 친숙한 상태였으며 이전에도 이미 이런 종류의 음악을 연주한 경험이 있었다. 예비 리허설 동안 나는 각 파트의 수석 주자들을 만났다. 그들이 각자의 파트를 맡고 나는 그들을 위해 연주했다. 무대에 설 때쯤에는 그들은 그 곡을 완벽하게 연주할수 있었다. 베베른이 할 일은 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격려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미 그들은그가 원하는 것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단지 그들을 바라보고 있기만 하면 됐다. 그들은 그의 손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의도를 간파해낼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지휘방식은 바르셀로나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케스트라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다. "모든 인간관계중에서 특별히 음악 활동에서는 서로간의 이해와 신뢰를 위해서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같은 이해의 파장을 호흡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 베베른과 BBC 오케스트라 사이에는 이런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들은 항상 그와 이해의 폭을 같이 했다. 일상적으로 흔히 말하는 완벽하게 연주하는 좋은 공연이 아닌 위대한 음악적 경험을 할 수있는 위대한 공연은 바로 이런 지휘자와 단원들 사이의 호흡의 일치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런던에서는 베베른의 말 한마디 한마디, 몸짓 하나 하나의 의미까지도 이해되었으며 애정어린 마음으로부터의 경청의 대상이 되었다.

베르크의 영혼을 불러낸 연주
 공연장의 분위기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정도로 진지했다. 베베른과 오케스트라 단원들, 그리고 나는 모두 무아지경에서 연주했다. 음반(주1) 을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여유있고 사려깊은 연주였다. 그것은 각각의 악구에서 최대한의 의미와 표현미를 끌어내기를 원하는 베베른적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완벽한 베베른 색깔의 음악이었다. 베르크의 협주곡의 음 하나하나는 일생에 걸친 베베른의 신조대로 한음 한음 그 '나름대로의 생명력'이 사려깊고 신중하며 경건하게 되살아났다.
 연주하는 동안 나는 베베른의 꿰뚫는 시선과 그의 충만한 위력 앞에서 점점 뒤로 물러앉게 됐다. 바르셀로나의 비극을 기억하고 있었던 나는오직 그만이 홀로 공연을 주도하기를 희망했다. 이것은 아마도 현명하지 못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음반을 들어보면 독주 부분과 관현악 사이의 불균형을 느낄 수 있는데 내 바이올린이 마이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마이크 같은 것은 아주 잊어버린 상태였다.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나는 수 년전에 쿠르츠만 박사의 집에서 있었던 그 자신과 (나를 포함한) 열렬한 그의 청취자들을 베토벤 음악의 세계로 몰입하게 했던 베베른의 베토벤 소나타 레슨이 생각났다. 그는 이번에는 재창조하는 위력을 통해서 죽은 친구 알반 베르크의 영혼을 불러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이후로 나는 베베른과 원만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이유들 중 하나는 내가 매우 어렸으며 그에게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어리석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단히 많은 작곡가들과 지휘자들과 함께 일했으며 그들 중 몇 명과는 아주 절친한 사이다. 나는 그들을 솔직하고 친절하게 대하고 그에게도 똑같이 했다. 베베른은 나의 이러한 솔직한 성격을 좋아했다. 그는 말끝마다 그에게 굽신거리는 사람보다는 솔직한 사람을 더 좋아했다. 나는 그의 위대한 음악적 지위를 알고 있었지만 굽신거리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말했다. 그리고 그가 내색은 하지 않지만 고민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베르크, 쇤베르크, 베베른은 매우 절친한 사이이며 서로에게 헌신적이었는데 차이점이 생겼다. 어떤 면에서 볼 때 베르크가 심지어 쇤베르크보다도 성공했다. 쇤베르크는 작곡가로서 뿐만 아니라 위대한 선생이자 음악적 명상가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그 당시 베베른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그 자신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내가 베르크에게 협주곡을 의뢰한 것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런던에서 그가 나를 볼때마다 그런 느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침내 내가 그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당신에게 뭔가 다른 것을 원해요. 나는 솔로 소나타를 한곡 부탁합니다." 내가 말했듯이 나는 그를 두려워할 정도로 어리석었으므로 다른 작곡가들에게는 벌써 말한 내용을 이제야 그에게 털어놓고 말했다. “당신의 음악에서는 음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해요. 그래서 계속성에 문제가 있어요. 예를 들어 말하자면 당신은 몇 개의 악기들을 위해서 곡을 써요. 한 연주자가 몇음을 연주하고 다음 연주자에게 넘겨주고, 그 다음 연주자가 몇음 연주하고 다시 다른 연주자에게 넘겨주지요. 이런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처음의 연주자는 그동안 곡의 흐름을 잃어버리게 되고 자신의 연주 순서를 기다리면서 지루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나는 감히 그에게 직설적으로 지적했던 것이다.
 나는 계속 말했다. "4개의 각각 다른 음색을 내는 4대의 솔로 바이올린을 위한 곡을 작곡하려고 하는 겁니까? G, D, A, E 현들은 모두 한대의 바이올린에 속한 음들입니다. 그런 곡을 연주하려고 한다면 그의 바이올린에게는 아주 거대한 곡이 되겠지요 바흐의 샤콘느만큼이나 긴 곡이 될 겁니다." 물론 그는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적절한 지적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과하지 않았다. "내 말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작곡할 필요가 있을 때만 작곡하세요. 그러나 한악기에 고정시키세요. 내말은 어떤 악기는 항상 A음만을 내고 다른 악기는 언제나 E음만을 내라는 얘기가 아니예요. 하지만 당신 식대로 하면 그런 종류의 곡이 되고 말 것예요" 잠시 후 그는 대답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는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곧 그 일을 잊어버렸고 전쟁이 일어나자 우리가 주고 받은 대화는 더이상 쟁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뒤 나는 트렁크에서 베르크 협주곡 음반과 함께 베베른의 편지를 발견했다.
 "친애하는 크라스너에게, 솔로 소나타에 대한 당신의 제의를 생각해보았는데 당신을 위해서 한 곡 작곡하기로 결심했음을 알리오. 나는 지금 피아노 곡을 쓰고 있는데 그 곡을 마치는 대로 당신을 위한 소나타를 작곡하겠소"
 나는 베베른의 자필 악보를 가지고 온 몰덴하우어에게 그것을 찾아보도록 부탁했다. 내가 물었을 때 그와 그의 스태프들은 그들이 아직 일람표를 작성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딘가에 바이올린 솔로 소나타가 있을테니 꼭 찾도록 하세요" 결과야 어떻든지 간에 나는 나의 제의를 수용하고 친절한 마음을 표현한 그 편지를 발견하게 돼서 무척 기뻤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것이 좋은 지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클렘페러가 지휘를 맡은 두번째 베르크 협주곡 연주는 나치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사되었다.


나치가 방해한 클렘페러와의 협연
 빈에서 클렘페러의 지휘로 어렵사리 했던 세번째 베르크 협주곡 연주에 대해 말하기 위해 잠시 베베른에 대한 얘기를 접어두기로 하겠다. 클렘페러는 나치가 세력을 잡은 해인 1933년에 독일을 떠나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그러난 그는 여전히 빈 필하모닉에서 객원지휘자로 있었으며 빈 필하모닉에서 베르크를 연주하고 싶어했다. 그는 BBC와 공연한지 6개월이 채 안된 10월 25일 일요일 아침으로 연주 일정을 잡았다.
 나는 예정된 리허설 시작 날짜보다 1주일 정도 빨리 빈에 도착했다. 리허설이 시작되기 3일전에 갑자기 클렘페러가 베르크 협주곡 공연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고 내게 말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주를 거부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돈다는 것이었다.
 “왜요?"
 “볼셰비키 음악이고 유태인들이 연주하기 때문에."
 그때가 1936년이었고 오케스트라 단원들 대다수가 이미 나치 당원들이었다.
 물론 클렘페러는 말했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거요. 내가 그들과 맞서보겠소. 그들도 연주하지 않을 수 없을 거요."
 그리고나서 바로 베르크 협주곡 공연이 불투명하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바로 다음날 나는 신문에서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빈 필하모닉의 원로 제1바이올린 수석 주자인 아르놀트 로제가 자신이 베르크 협주곡의 관현악 반주를 맡겠다고 발표한 것을 읽었다. 로제는 말러와도 친분이 있고 베르크의 친한 친구였다. 그는 이미 은퇴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며 주요 작품의 연주회에서 연주했으며 결코 협주곡 반주는 하지않았다. 그의 발표는 즉시 단원들의 반발을 막아냈다.
 클렘페러는 만약 그들이 베르크 협주곡 연주를 거부한다면 그는 다시는 빈 필하모닉을 위해서 지휘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전갈을 단원들에게 보냈다고 직접 내게 말했다. 더 나아가 그는 빈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그들이 연주를 거부한 것을 국제사회에 폭로하겠다고 했다. 빈 필하모닉은 단원들이 직접 운영하는 자치단체이다. 오케스트라가 오페라 연주자를 결정하고 자신들의 연주회를 운영한다. 클렘페러가 지휘대에 서자 표가 잘 나가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가 위협하자 굴복했던 것이다.
 문제가 생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결국 연주를 했다. 사실은 나치당원들이 연주회장에 와서 정치적인 시위를 했던 것이다. 상당수의 베르크와 쇤베르크 추종자들도 박수 갈채를 보내며 반대의 시위를 했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우리가 갈채에 답례인사를 하기도 전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우리는 이것을 하기 원하지 않았다" 라는 항의의 표시로 일제히 일어나서 무대에서 사라졌다. 무대에 로제와 클렘페러 그리고 나 이렇게 세사람만을 남겨놓고 말이다.
 수 년후 빈에서 나는 이 사실을 수석 비올라주자로 있는 유태인이 아닌 내친구에게 말했다.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내게 말했다. 그들은 모두 비밀 연락망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나치 당원들처럼 만났다.
 "나도 그들 중 한사람이었어요." 그가 말했다. "내 친구들 모두 1940년까지 열렬한 나치당원으로 남아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인가 나는 빈 교외에 있는 내집 창문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어요. 군대에 의해 빈에 내버려진 수백명의 아이들이 강제수용소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눈내리는 겨울 벌판을 맨발로 걷고 있었어요. 나는 친구에게 내가 본 것을 얘기했고 그 뒤 우리는 그 조직에서 나왔지요."

루이스 크라스너
1903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미국으로이주했다.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공부했으며 유럽과 미국에서 독주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44년 미트로풀로스가 지휘하는 미네아폴리스 심포니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1949년 그가 시라쿠세로 이주할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그곳에서 시라쿠세 심포니의 연주여행에 참여했으며 지방의 실내악 애호가 모임을 조직했다. 1972년까지 대학에서 바이올린과 실내악을 가르쳤다. 1976년 이후로 뉴잉글랜드 음악원과 탱글우드에 있는 버크셔 음악센터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작곡을 의뢰해서 초연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잘 알려졌으며, 또한 일반 베르크의 협주곡을 최초로 녹음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쇤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해서 녹음하기도 했다. 광범위한 분야의 현대음악에 관계했으며, 그가 초연한 현대음악작품으로는 카세라와 세션의 곡, 그리고 코웰과 해리스의 소품들이 있다. 코웰과 해리스에게는 바이올리니스트 자신이 직접 작곡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의 음반목록에는 작곡가가 직접 피아노 반주를 맡았던 피스턴의 소나타와 미트로풀로스가 지휘하는 쇤베르크 세레나데의 바이올린 파트가 포함되어 있다.

(주1) 크라스너는 이 연주를 그가 지금까지 했던 협주곡연주 중에서 가장 아꼈으며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서 BBC로부터 공연 실황 테이프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BBC측은 그 실황 테이프를 갖고 있지 않은척 했다. 그러던 중 1970년대 중반 시라쿠세 대학에서 은퇴한 후에 크라스너는 자신에 대한 주요 기사들을 정리하던 중 우연히 BBC공연의 아세테이트 디스크를 발견했다. 이 음반들은 음향상의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있었으며 면마다 녹음의 질도 차이가 많이 났다. 상당수의 작품들이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녹음을 다시 해야 했다. 마침내 서독 라디오 방송국에서 그것들을 복원해내서 알반 베르크 탄생 100주년기념일인 1965년 2월 9일에 방송했다. 그 작업은 크라스너가 시라쿠세 대학에 재직할 당시 동료로 일했던 음향 엔지니어 리처드 번즈가 맡았는데 그는 Pack-burn 오디오 잡음 억제기의 공동 발명자이기도 하다. 그 이후 번즈는 디스크의 음질을 좀더 향상시켰다. 최근 베베른이 지휘한 다른 공연들과 함께 음반으로 발매하기 위한 협상이 진행중이다.

<다음호에 계속>

Posted by javaop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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