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4K 리마스터링으로 국내 재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복잡한 정세의 요즘 시기에 "희생"을 보면 느낌이 남다르게 다가올 듯 합니다. 비디오를 빌려서 형이랑 같이 "희생"을 감상했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영화를 보고나서 부산 서면 대한극장 맞은 편에 있는 레코드 가게에 가서 바흐의 마태수난곡 CD를 구입했었죠. 아무래도 학생 때여서 세 장짜리 이 음반을 고민하면서 구입을 했었네요. 나중에 명절날이 돼서 시골 작은 아버지 댁에서 형들이랑 있는데 비디오를 빌려보자고 다들 그래서 스콜세지의 "카지노"를 빌려서 본 기억도 납니다. 마태수난곡 음악이 곁들여진 차 폭발하는 오프닝 장면이 무척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제39곡 : 아리아(알토영창) - 영화 "희생" 아.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눈물로 보아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 앞에서 애통하게 우는 나의 마음과 눈동자를 주여, 보시옵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제68곡 : 합창 - 영화 "카지노" 우리들은 눈물에 젖어 무릎꿇고! 무덤속의 당신을 향하여 편히 잠드시라 당신을 부릅니다 지칠대로 지치신 몸! 편히 잠드소서! 당신의 무덤과 묘석은 번민하는 마음에 편안한 잠자리가 되시고 영혼의 휴식처가 되소서 이리하여 이 눈은 더 없이 만족하여 우리도 눈을 감나이다 우리들은 눈물에 젖어 무릎꿇고 당신을 부르나이다
내가 처음 타르코프스키를 만난 것은 첫 소련 방문 때 모스필름에서 열린 환영오찬 자리에서였다. 그는 키가 작고 말라서 다소 몸이 약해 보였으나 머리가 굉장히 뛰어나고 유난히 감성이 도드라져 보여서 왠지 다케미츠 토루(작곡가)와 매우 닯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촬영이 있다면서 도중에 자리를 떴는데 잠시 뒤 식당 창문 유리가 심하게 떨릴 정도의 폭발음이 들렸다. 내가 놀란 얼굴을 하자 모스필름 소장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전쟁이 일어난 게 아닙니다. 타르코프스키가 로켓을 쏘아올린 거예요. 하긴 저한테 이번 타르코프 스키와의 작업이 큰 전쟁이긴 합니다만.'
타르코프스키는 그때 솔라리스를 촬영중이었던 것이다. 점심식사후 나는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 세트를 방문했다. 과연 까맣게 타버린 로켓이 우주위성기지 세트의 한쪽 구석에 있었다. 세트에서 로켓을 쏘아올리는 장면을 어떻게 촬영했는지 묻는다는 걸 아쉽게도 깜빡하고 말았다. 위성기지 세트는 큰 돈을 들여서 공들인 것으로, 두꺼운 두랄루민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차가운 금속제의 은색 빛으로 빛났고 나란히 늘어서있는 계기류의 광전관이 적색, 청색, 녹색의 광선으로 미묘하게 깜빡이거나 물결치듯이 움직 이고 있었다. 그리고 복도 천장에는 두 개의 두랄루민 레일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레일에는 위성기지 내부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카메라의 작은 바퀴가 매달려 있었다. 타르코프스키는 마치 아끼는 장난감 상자를 보여주려는 아이 마냥 밝은 표정으로 설명을 해가면서 세트를 안내해주었다. 함께 따라온 본다르추크가 세트 제작에 들어간 비용을 물었는데 타르코프스키의 대답을 듣고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트 제작비용은 '전쟁과 평화'의 본다르추크마저도 놀라게할 정도로 큰 금액이었는데 일본 돈으로 하면 약 6억엔 정도가 들었 다고 한다. 모스필름 소장이 자신에게 큰 전쟁과 같다고 말한 의미를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돈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의 재능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건 굉장한 작업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열정적 으로 세트를 안내하는 타르코프스키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솔라리스가 지나치게 길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내 생각은 다르다. 특히 도입부의 자연묘사가 너무 긴게 아닌가 싶지만 지구의 자연과 이별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의 중첩이 주인공이 우주위성기지에 쏘아 올려진 이후의 이야기 밑바닥에 깔려있어서 견딜 수 없는 지구 자연에 대한 향수로서 관객의 가슴을 죄어온다. 그것은 향수병과도 닮아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긴 도입부가 없다면 위성기지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간절한 기분을 관객이 직접 느끼도록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을 밤늦게 모스필름 시사실에서 보았는데 보고 있는 동안 지구로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기분이 들 면서 가슴이 아파왔다. 과학의 진보는 인간을 대체 어디로 끌고 데려가는 것일까. 무서운 감정을 이 영화는 훌륭 하게 담아서 보여주고 있다. SF영화에 이것이 없다면 단순한 몽상이 되고 만다. 솔라리스를 보고 있는 나의 머리 속에 그런 감회가 오고 갔다. 그때 타르코프스키는 시사실 구석에서 함께 보았는데 영화가 끝나자 부끄러운 듯이 나를 보면서 일어섰다. 나는 타르코프스키에게 말했다.
'굉장히 좋네요. 무서운 영화군요'
타르코프스키는 수줍은 듯 하지만 기쁜 듯이 웃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영화인협회 식당에서 보드카로 건배를 했다. 평소 술을 마시지 않는 타르코프스키는 크게 취해서 식당에서 틀고 있던 스피커의 음악을 끄고서는 7인의 사무라이 테마 음악을 큰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나 역시 지지 않고 함께 불렀다. 나는 그때 지구에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행복했다. 솔라리스는 보는 사람에게 그런 감정을 안겨주는 것만으로도 보통의 SF영화가 아니다. 굉장한 공포를 안 겨 주는 영화다. 그리고 그것은 타르코프스키의 날카로운 감성이 잡아낸 것이다. 이 세계에는 아직 인간이 모르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인간이 엿본 우주의 심연, 위성기지의 기묘한 방문객, 죽음에서 삶으로 역행하는 시간, 무중력의 기묘한 감각, 위성기지의 주인공이 떠올린 그의 집은 물에 젖어 있다. 그것은 무언가 주인공의 절실한 감정이 온몸 에서 짜낸 땀이나 눈물처럼 보인다. 그리고 소름끼치게 하는 것은 도쿄 아카사카미츠케의 로케이션 장면이다. 거울을 능숙하게 사용하면서 자동차의 헤드램프와 테일 램프의 움직임을 증폭시켜서 미래도시를 만들어낸 쇼트. 솔라리스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재능은 곳곳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난해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타르코프스키의 감성이 남달리 날카로울 뿐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솔라리스 이후 거울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그의 어릴 적 기억을 그려낸 작품이지만 이 영화 역시 난해하다는 사람이 많다. 얼핏 보기에 맥락없는 전개를 보여주는 영화다. 하지만 어릴 적 기억이 논리정연 하게 이어져 있을 리 없다. 조각나있는 기억의 파편이 기묘하게 이어져 있는 것에서 유년 시절에 대한 시를 만들어 낸다. 그렇게 본다면 이렇게 이해하기 쉬운 영화는 없다. 하지만 타르코프스키는 그러한 것은 아무런 말도 없이 입을 다물고 있다. 나는 그것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장래성을 본다. 자신의 작품을 해설하기 바쁜 사람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