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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리뷰 1994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안톤 베베른과 베르크, 1930년대 빈에 대한 추억

글 / 루이스 크라스너

1930년대의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과 나치주의의 발흥 등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가지 새로운 문화를 낳았고, 음악에서도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으로 대표되는 소위 '빈학파' 라는 새로운 음악운동을 탄생시켰다. 이들 '빈 학파'의 작곡가들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바이올리니스트 루이스 크라스너는 이 글에서 당시의 혼란했던 사회상과 여러 작곡가, 연주가들의 뒷얘기들을 들려준다.


괴링의 유혹을 거부한 지휘자 프리츠 부슈
 클렘페러가 어떻게 나치를 이겼는지 생각하자 그들과 관계가 있었던 또 한 사람의 지휘자가 떠올랐다. 바로 프리츠 부슈이다. 우리가 스톡홀름에 있을 때 그의 입을 통해서 직접 그 얘기를 들었다. 1938년 봄 우리는 그곳에서 베르크 협주곡 공연을 했다(주1). 연주가 끝난후 나는 부슈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러 나갔는데, 그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 주었다. 부수는 헤르만 괴링과 매우 친한 사이였다. 하루는 괴링이 부슈에게 사무실로 와달라고 했다. 공적인 자리였다. 괴링이 말했다.
 "프리츠, 상부에서 이미 결정된 사실인데 자네가 독일 전체를 대표하는 총음악감독이 되어주게. 자네는 내 친구일세, 내가 자네를 추천했고 상부에서 받아들인 것이네. 이제 나는 자네가 이 일을 맡아주기 바라고 아울러 그 일에 걸림이 되는 것을 깨끗이 정리했으면 하네."
 프리츠는 동생 아돌프를 통해서 제르킨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는데, 그는 유태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괴링이 걸림이 된다고 말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도 친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생각해 보겠노라고 말하고는 그곳을 나왔다.
 그는 내게 말했다. “나는 면담을 끝내자마자 바로 기차역으로 가서는 스위스행 기차를 탔습니다. 심지어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스위스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신분확인을 위해서 항상 여권을 가지고 다니도록 되어 있었다. 부슈는 푸르트벵글러와 슈트라우스를 위해 변호했던 일을 얘기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화난 어조로 말했다. 그들도 물론 숙청됐다.
 “당신은 그 일을 하고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든가 아니면 포기하든가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는 나치 통치 아래 생활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갖고 있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나서는 더이상 사태를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푸르트벵글러가 했던 것처럼 도시를 떠났습니다."

혼돈의 도시 빈
 스톡홀름 연주는 1938년 4월 20일에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독일 · 오스트리아 합병이 있기 5주 전이었다. 이제 나는 독일 · 오스트리아 합병 바로 직전으로 건너뛰려고 하는데 당시 빈은 혼란과 소요의 와중에 있었다. 오스트리아 나치당과 슈슈니크의 정부 사이에 치열한 정치적인 분쟁이 있었으며 슈슈니크의 내각이 서서히 그러나 아주 확실하게 그 세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날마다 수천의 친나치주의자들이 슈슈니크 정부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언젠가 겁도 없이 그 시위군중들 속에 들어갔던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얼마나 난폭하게 변했는지 보고는 놀라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만약 그들이 그때 내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들은 그곳에서 나를 갈갈이 찢어버렸을것이다. 주변에는 그들을 막을 경찰도 없었으며그 도시에서 그들은 광란의 살인자들이었다.
 그 당시의 일 가운데 특별히 나를 괴롭히는 기억이 한 가지 있다(나는 역사가들이 이것을 조사해서 진실을 밝혀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여기에 쓴다). 그것은 바로 내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이니처 추기경 사건이다. 잘 아는바대로 오스트리아는 독실한 가톨릭 국가이며, 슈슈니크 정부 또한 신실한 가톨릭을 표방했다. 이니처 추기경은 오스트리아에서 모든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정치적인 영향력도 행사할 수 있는 정신적인 지도자였다. 정부가 그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는 확실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고 정부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신문에서는 연일 이것을 보도했고 마침내 추기경이 그 일로 로마에 상담하러 불려갔다. 슈슈니크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오스트리아의 가톨릭 정부는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다시 품게되었다. 그러나 빈에 돌아온 추기경은 충격과 실망만을 가져왔다. 합법적인 정부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발표를 기대했으나 결국 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결코 그런 것은 없었다. 심지어 교황까지를 포함한 가톨릭 성직계층에도 친나치주의자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지 순진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공개적으로 반대하기에는 독일이 너무 강했으므로 살아남기 위해 묵인했던 것일까?


베베른의 마지막 배려
 바로 그 시기에 베베른과의 마지막 개인적 접촉이 있었다. 그와는 런던에서의 협연 이후에도 계속 교류가 있었다. 빈에 오면 나는 종종 그를 찾아가곤 했다. 사실 나는 1938년 3월 12일 독일 침공 시기에 뫼들링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나왔다. 그날 오후 우리는 쇤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다. 아직 초연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나는 그 악보를 갖고 있었으며, 그를 위해 연주했다. 그는 아주 기뻐했다. 3/8박자 부분을연주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말했다. "다시한번 해봐요. 마치 슈베르트 왈츠 같군요" 쇤베르크의 그 난해한 곡을 그는 그렇게 평했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는데 갑자기그가 내 팔을 잡고 몇시냐고 물었다. 시계를 보니 정각 4시였다. 그는 달려가서 라디오를 켰다. 그러자 슈슈니크의 음성이 들렸다.
 “방금 독일 군대가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습니다. 나는 형제끼리 싸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 오스트리아 장병들에게 후퇴를 명했습니다."
 베베른은 나를 잡고 소리쳤다.
 "크라스너, 여기 외투가 있어요. 빨리 뛰어서 집으로 가요!"
 그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이미 나치 깃발이 펄럭이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소리치며 축하하고 있었다.
 베베른이 말했다. "서둘러요! 두 블럭 내려가서 택시를 타요!"
 가는 길에 나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을 만났는데, 내가 지나가자 그들은 소리지르고 나를 따라오면서 협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유태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물론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마침내 두 블럭을 지나서 택시를 발견하고 뛰어들어갔다.
 “바로 제때에 택시를 잡으셨군요!" 택시 기사가 말했다. 그는 나를 빈으로 데려다 주었으며, 정말 긴 택시 여행이었다.
 항상 나는 그 일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다. 베베른은 4시에 나치가 국경을 건너고 슈슈니크가 항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베베른의 집에서 나온 후에 어떤 사람들이 그의 집에 왔을까? 그는 나를 재빨리 몰아냈다. 나는 그것이 나의 안전 때문이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아마도 내가 그의 집에 있음으로해서 그의 가족들이나 혹은 나치의 오스트리아 입성을 축하하기 위해 온 그의 친구들과 부닥쳤을 때의 당혹감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리라.


빈에서 목격한 히틀러의 모습
 택시가 숙소에 나를 내려주었을 때 여러분은상상하기를 내가 안전한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모험을 좋아하고 호기심 많은 젊은이였던 나는 상황을 알기 위해 다시 거리로 나왔다. 그후 나치 수송차량이 지나는 길가에 있는 주유소들은 가솔린을 가득 채워놓고 나치 군대가 지나갈 때마다 연료를 공급해서 그들이 전속력으로 빈에 입성할 수 있게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습을 드러냈다. 최초의 나치 전차가 도착했을 때 나는 링슈트라세에 있는 황제 호텔 앞에 있었다. 그리고 곧 한 사람이 나타나 무개차에 서서 팔을 뻗쳐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바로 히틀러였다. 이것은 내가 베베른의 집에서 라디오로 슈슈니크의 음성을 듣고 난 두세 시간 후의 일이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환호하거나 환영하는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 저녁 내내 나는 거리를 배회했으며, 빈 외곽에 정차해 있는 나치 전차들을 보았다. 그리고 사방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다음날 아침 신문에는 임박한 히틀러의 도착을 환영하는 발표로 가득 찼다. 새로운 입장인 셈이다. 이번은 수천의 환호하는 지지자들로 잘 준비된 입장이었다. 나는 그 어디에서도 히틀러가 실제로는 빈에 두 번 입성했었다고 쓴 것을 보지 못했다. 너무 서두른 첫번째는 충격에 싸인 도시의 텅빈 거리밖에 보지 못했다. 두 번째는 선전전술에 의해 전형적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그후 곧 독재가 시작되었다.
 그 다음 수주 동안에 나는 폭군의 군대를 포함해서 몇몇 나치들과의 더 심한 이변을 경험했다.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손해보지 않았다. 이겼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내가 얼마나 무모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모했지만 승리한 나치와의 대결
당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한 사건을 말하겠다. 그러나 우선 그 배경부터 약간 설명해야겠다. 나치의 점령으로부터 오스트리아를 지키려는 최후의 몸부림으로, 슈슈니크 수상은 국민투표를 해서 반 나치 여론을 조성함으로써 히틀러 를 누르려고 시도했다. 오스트리아 국민은 독립 할 것인지 아니면 나치 지배 아래 통합할 것인지를 투표로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당연히 히틀러는 국민투표 결과로 빌미를 주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던 것이다. 약 한 달 뒤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양국에서 실제로 국민투표가 실시됐는데 결과는 나치가 99%의 지지를 얻었다. - 적어도 숫자로는 그랬다.
 국민투표가 시작되기 전에 한동안 곳곳에 플래카드가 걸렸고, 거리에는 분필과 페인트로 쓴 구호가 난무했다. 그후 나치는 유태인들에게 이러한 거리의 구호를 지우는 일을 시켰다. 그들은 큰 길에서 사람들을 가로막아 세우고는 유태인들에게 그 일을 시켰다. 따라서 그때의 사람들은, 오페라 극장 앞의 모퉁이를 지나가면서 유태인 교수들이나 의사들이 물 한 양동이를 옆에 놓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반나치 구호를 문질러서 지우는 모습을볼수 있었다. 나는 그일을 해야만 했던 나의 친구에게 그 사실을 들었으며 나 자신도 몇번이나 하게 될 뻔했다. 더이상 감히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내 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 그런 일을 하도록 강요당한다면 맞서 싸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내가 예상하고 있던 사태가 발생했다. 그때 나는 여행을 하기도 하고 연주회도 하면서 아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프리츠 부슈와 했던 스톡홀름에서의 연주도 그때 한 연주들 중 하나였다. 이런 연주 여행에서 빈으로 돌아올 때 나는 보통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를 이용했다. 나는 그 여행사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모두 미국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언제나 친절할 뿐만 아니라 또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독일인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치가 정권을 잡자, 나는 과거와 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거의 내게 말조차 건네지 않았고, 나는 이제 더이상 그곳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즉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를 떠나서 오페라 극장으로 되돌아오는 도중에, 내 쪽을 향해서 똑바로 걸어오고 있는 검은 군복을 입은 두 명의 나치병사를 만났다. 키가 큰 녀석들이었다. 약간 긴장하기는 했지만 나는 이러한 상황에 화가 치밀었다 나는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나는 그들 정면으로 걸어갔고 그들은 나 때문에 서로 갈라져야 했다. 내 생각에 그들은 놀란 것 같았다. 아마 그때까지 반나치주의자들도 그들 앞에서는 움츠러들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지나가고 난 뒤에 갑자기 그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너!"
 나는 돌아서서 말했다. "나 말이오?”
 “이리 와봐!"
 “왜 그러시오?'’
 “이리 와보라니깐!"
 “할 말이 있으면 ‘이리로 와서 하시오."
 내가 보기에 이들은 제대로 훈련받은 군인이 아니었는데,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방금 군대에 들어와 훈련도 받지 못한 문맹의 오스트리아 나치인 듯했다. 그들이 내게로 걸어왔다. 그들은 말했다.
 "우리와 같이 가야겠소. 거리에 있는 저 건물에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소"
 내가 주춤하자 그들은 내 옆구리를 잡고 내게 말했다.
 “같이 가는 게 나을 거야!"
 나는 순순히 응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아주 우아한 건물로 들어가서 4층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건설회사 사무실의 문을 열자 담당하고 있던 여자가 소리쳤다.
 “맙소사, 어디 있었어요? 얼마나 오래 기다렸 다구요"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길거리에 쥐새끼 한 마리라도 있어야 말이지. 이 작자가 우리가 겨우 발견한 유일한 놈이야.’
 그리고 나서 그는 나를 돌아보고 명령했다.
 “이 방에 쌓여 있는 잡동사니 물건들을 지하실로 옮겨다 놔!"
 “하지 않겠소! 당신들이 할 일을 왜 내가 한단 말이요?”
 “우리는 이미 충분히 했어!"
 그가 내게 다가와 내 얼굴에 대고 소리쳤다.
 “이제 네 차례란 말이야, 명령을 따르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어디 할 말 있어?”
 “있소"
 나는 안주머니에서 붉은색 여권을 꺼내 그들의 코앞에 내밀었다.
 “여기 있소"
 그들은 내 미국 시민권을 보고는 셋이 서로 바라보면서 어쩔 줄을 몰라 당황했다. 마침내 그 들 중 하나가 큰소리로 말했다.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유를 말하겠소. 그저께 런던과 빈에서는 결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부인하는 독일 정부의 성명서를 신문에서 읽었고, 그 다음날 암스테르담에서도 다시 부인하는 내용의 기사를 보았으며, 바르샤바에서도 같은 내용의 기사를 읽었소. 나는 내 눈으로 정말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오. 이제 진실을 알게 됐소"
 그래서 그들은 나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얼마나 떨렸던지. 나는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나는 이제 나를 적대시하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링슈트라세를 건너서 두 블럭쯤 내려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차들이 질주하는 그곳에 스웨덴 여행사가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반쯤 길을 건넜는데 아까의 검은 군복들이 나를 따라왔다.
 "당신 여권을 디시 한번 봅시다."
 경험이 없어서 당황한 그들은 내 여권을 펼쳐서 조사해 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이번에는 비자를 아주 자세히 조사했다. - 모든 것이 다 제대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두 번째로 나를 풀어 주었다.
 여행사에 도착하자 나는 미국 영사를 불러서 말했다.
 "이제 어느 곳이든 밖에 나오기가 두렵습니다."
 그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지 알려 주었다.
 "이런 일들이 미국인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베를린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람들은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루이스 크라스너는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한 바 있다.


베베른을 변호하다
 공포의 시간들이었다. 나는 유럽에서 연주활동을 했지만, 겁에 질린 친구들 을 만나고 그들이 빈을 떠나는 것을 돕기 위해 언제나 빈으로 돌아왔다. 나는 영사관의 비자 지원자들 명단의 맨 첫번째에 그들의 이름이 적히도록 하려고 애썼다. 그런 방식으로 빈을 탈출한 많은 내 친구들 중에는 쇤베르크의 딸 게르투르드와 사위 펠릭스 그레이슬레, 루돌프 쿠르츠만 박사가 있었다. 쿠르츠만 박사는 아내 없이 홀로 미국에 와서 우리와 함께 살다가 후에 보스턴에 정착했다(그의 아내 리타는 작곡가 어윈 로이처와 재혼해서 아르헨티나로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천명의 사람들이 이민을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해 말 미국에 돌아왔을때 나는 최근 자신의 조국에서 이민한 에드바르트 스토이어만과 연락이 됐다. 그는 수년 동안 쇤베르크 서클을 주도해왔으며 서클의 중요한 초연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곤 했다. 그가 내게 말했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쇤베르크가 몹시 염려하고 있어서요. 우리는 베베른이 나치와 관계가 있고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을 여러번 들었어요. 사실인가요? 그게 사실이라면 쇤베르크에게는 충격이 클 거요. 그는 베 베른에게 대단한 찬사를 보내며 자신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헌정했습니다.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는 그것을 취소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절대 그맇지 않습니다."
 나는 그에게 열심히 거짓말을 해댔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 보건대 내가 그렇게 한 것이 기쁘다. 내 짐작에 그는 내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던 것 같다. 심지어 쇤베르크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헌정을 취 소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 그는 웅장하고 화려한 악구를 없애버린 것 같다. 그러나 베베른에 바치는 헌정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베베른은 전쟁으로 인해 깊은 정신적 상처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공개되지 않았던 이야기
 전쟁의 발발과 함께 사실상 베베른과의 연락은 단절되었다. 그리고 그와의 개인적인 연락이 끊어졌으므로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지금까지 공개된 적이 없었던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싶다. 그것은 쇤베르크의 아들 게오르크로부터 전해들은 사실이었다. 나는 지금이 이것을 공개할 적절한 시기인지, 아니면 백 년쯤 더 기다려야 하는 건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그러나 나는 빠를수록 좋다는 쪽으로 생각을 굳히기로 했다.
 쇤베르크는 알렉산더 젬린스키의 누이동생과 첫번째로 결혼했는데, 그들 사이에는 딸인 게르투르드와 아들 게오르크가 있었다. 게르투르드는 1938년 미국으로 이민 왔고, 게오르크는 전쟁 동안 빈에 남아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30대를 보냈다.
 나는 진쟁이 끝난 1950년 초에 그를 빈에서 만났다. 그는 길혼도 했고 아이들도 있었다. 놀랍게도 딸 가운데 한 명은 벌써 결혼할 나이였다. 그는 딸에게 지참금을 마련해줄 수 없다고 걱정 했다. 그에게는 아버지 쇤베르크가 준 그림 3점이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팔기를 원했다. 물론 나는그것을 샀다. 나는 그가 원하는 만큼의 돈을 지불하기는 했지만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빈 을 떠나기 직전에 그의 딸을 만나서 조금 더 주었다.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 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 그림-쇤베르크 자신이 그린 유화-을 갖고 있다. 그것들 중에는 전쟁 때의 총알 구멍이 남아 있는 것도 있다.
 나는 게오르크에게 전쟁 기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었다. 우리는 여러 시간 동안 얘기했다. 그는 그 당시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매우 곤란한 상태였다. 일자리도 거의 없었고 때때로 일반 간행물의 사본을 만드는 일을 했다. 유태인이었던 그는 항상 숨어 지내야 했다. 그는 말했다.
 “베베른이 나를 많이 도와주었어요 먹을 것을 주었고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의 아파트에 나를 숨겨주기도 했구요."
 사실 게오르크는 베베른의 가족 때문에 일이 애매하게 되어서 죽을 뻔한 적이 한 번 있었다. 물론 그들 입장에서 보면 전혀 고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 마지막주에 베베른과 그의 아내는 잘츠부르크 근처 밀터질에 있는 딸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 뫼들링의 집을 비웠다. 그들은 거리에서 지내고 있던 젊은 쇤베르크에게 아파트를 넘겨 주었다. 뫼들링은 빈의 동쪽 외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군이 최초로 들어오는 곳 중의 하나이다. 물론 러시아군은 반나치주의자들에게 환영받았다. 그 당시 사람들은 나치 치하에서 고생을 너무나 많이 했기 때문에 환상에서 깨어나 반나치가 되어 있었다. 젊은 쇤베르크도 어느 날 갑자기 러시아 장교에 의해 나치 스파이라는 이유로 체포되기 전까지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병사들이 그를 마당에 세워놓고 처형할 준비를 했다. 그는 그들에게 애원했다. 아무도 그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가 너무나 시끄럽게 소동을 피웠으므로 처형이 연기됐다. 하루인가 이틀 후 또다른 러시아 장교가 그를 다시 조사해 보고 역시 또 그가 나치 스파이라고 단정했다. 다시 한 번 그들은 그를 처형하려고 했으나 또 한번 그는 구제됐다. 세 번째는 운좋게도 유태계 러시아 장교가 그를 조사했는데 그는 독일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완강하게 저항하는 게오르크의 반응을 보고 그 유태인 장교는 각 아파트에서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의 지하실로 그를 데리고 갔다. 베베른의 집 창고—물론 젊은 쇤베르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벽이 무너져 있었고 탄약과 총 그리고 온갖 종류의 나치 물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장교가 물었다.
 “이곳이 당신 아파트 창고 맞지요? 이것들을 뭐라고 설명할 건가요?"
 게오르크는 러시아 장교에게 그가 어린 시절 부터 하고 있었던 다윗의 노란 별을 보여주었고 마침내 그 장교에게 이 아파트의 창고가 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릴 수 있었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점이 있다. 베베른은 자신의 아파트 창고에 그런 물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의 사위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것들을 그곳에 몰래 갖다놓았단 말인가?
 나는 게오르크에게 물었다.
 “베베른은 어떻게 그런 것들로 인한 환멸의 감정에서 견뎌 냈습니까? 전쟁 동안 매우 견디기 힘들었을 텐데." 게오르크는 내 질문에 놀란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물론 그것은 베베른이 바르셀로나행 기차에서 내게 했던 이야기들로 미루어 내가 짐작 한 것이다. 나는 그가 어떤 상황을 기대했는지 알고 있었다.
 게오르크는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단지 나 혼자서만 그것을 지켜 보았지요、베베른은 전쟁 때 형언하기 어려운 종류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육체적인 류의 궁핍이 아니라 내면의 죄의식 - 양심의 고통 말입니다. 그는 자신이 환상 때문에 가장 친한 친구를 배신했다고 괴로워했습니다. "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크라스너의 의뢰로 6주만에 작곡되었다.


베베튼의 최후
 나는 게오르크에게 베베른이 어떻게 해서 뜻하지 않게 미군의 총에 맞았는지 물었다. 그의 설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이야기와는 달랐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베베른의 사위 중 한사람이 암거래에 연루되어 있었는데, 미군이 그날 밤 그를 체포하러 갔다. 그들 중 몇 명이 암시장 거래를 위해서 온 것처럼 위장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동안에 밖에 있는 군인들이 집을 포위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베베른이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왔다가 신경질적인 열성파 군인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베베른이 잘츠부르크 근처 산악지방에 있는 동안 게오르크는 빈의 동쪽 외곽에 있었기 때문에, 그사건의 목격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연관된 다른 내용의 이야기를 거의 확실한 것이라는 태도로 말했다. 그것은 내부 조직 들 사이에 알려진 것으로 그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려진 것처럼 베베른의 사위들은 나치 고위 당원이었다. 그리고게오르크의 말에 의하면 그 가운데 한 명은 미군이 전범으로 지명수배 한 인물이라고 한다. 고급 장교인 그는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게오르크는 이 사위는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바로 이 시간에 남미에서 살고 있다는 비밀을 털어놓았다.
 “미군이 그를 찾으러 왔었지요. 그들은 등화 관제가 있었던 아주 칠흑 같은 밤에 그 집에 접근했지요. 베베른이 우연히 담배를 피우러 나온 것이 아니었어요. 그가 군인들을 보고 그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일부러’ 밖으로 나와서 성냥불을 켜고 담배를 피운 것이지요. 그 동안에 뒷문을 통해서 사위는 도망쳤고, 그와중에 베베른이 총에 맞은 것입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베베른이 총에 맞는 순간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만약 내가 소설가라면 베베른 같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해서 소설을 쓸텐데. 소설 속의 그는 문화발전과 인도주의에 대한 자신의 소망과 믿음을 순전하게 확신하고 있는 고귀한 사고의 소유자로 묘사될 것이다. 그는 지능적으로 나치에게 이용당해 회생되며 자신의 생각의 오류를 깨닫고 환상에서 깨어나 고통받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베베른처럼 종교적인 인물일 것이다. 병사의 총에 의한 그의 죽음은 그에게는 구원이라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 순간 그는 마음속 으로 ‘오 나는 구원받았다. 이제 불타는지옥에서 영원히 보내지 않아도 되리라. 나는 지상에서 죄값을 치렀다. 나는 구원받고 속죄했다.’라고 외쳤으리라. 이것이 죽음의 순간 그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에게는 죽음이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게오르크의 생각도 비슷했다. 그는 베베른의 죽음을 ‘제3자에 의한 자살'이라고 불렀다.

이상주의로 뭉쳤던 세 작곡가
 나는 베베른이 죽은 지 2년 후인 1947년 쇤베르크가 죽은 동료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화해의 정을 담아 쓴 성명서를 발견했다. 이것은 특별히 베베른 협주곡 Op. 24에 포함할 의도로 쓴 듯했는데, 그 곡은 다음 해에 르네 라이보비츠가 출판했다. 그 협주곡은 물론 쇤베르크에게 헌정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제 잠깐 동안이지만 우리를 갈라놓았던 모든 일들을 잊어버립시다. 우리들에겐 사후의 미래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베르크, 베베른. 쇤베르크 우리 세 사람을 한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깨달았던 것을 헌신과 열정을 가지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그런 것 때문에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성명서는 1947년 6월 쇤베르크의 자필원고를 복제해서 다시 출판되었다. 이 글은 ‘빈의 3인조 현대음악가들’ 을 역사적인 관점으로 다루었다. 우리 세 사람을 함께 활동하도록 묶었던 것은 우리들의 이상주의적인 성향이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부분은 애매모호하게 쓰여졌다. 이 성명서에 관심을 가질 만큼 어리석은 음악학자들은 없을 것이다. “…우리를 갈라놓았던 일들을 잊어버립시다..." 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나치의 덫에 걸려 잘못된 길로 빠졌던 베베른을 의미하는 듯했다.

진정 ‘살아있는음악’을위하여
 이제 나는 결론을 맺으려 한다. 그러나 나는 베베른의 나치와의 연루, 뜻밖의 우연한 죽음, 쇤베르크의 화해의 글 따위의 우울한 분위기로 이 글을 마치고 싶지 않다. 베베른의 생애에는 많은 긍정적인 면들이 있었으며, 천재로서의 감동적인 일면이 있었다. 그는 내가 좋아하며 또 한 본받고 싶은 장점들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베베른이 음악 활동을 하는 방식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 즉 좀더 구체적으로 쿠르츠만 박사의 거실로 돌아가 베토벤 소니타를 분석하기 위해 모든 동기들의 의미와 기능을 조사하는 방식에 대한 것으로 끝맺으려 한다. 한 작품의 감정적이고 지적인 원천의 그 중심에 도달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해야 할 일이 있다. 베베른이 그랬던 것처럼 그 곡의 내면까지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와 똑같은 길문을 해야 한다. 첫 반쩨 모티프는 그 다음에 나오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었는가? 왜 다른 방식이 아니고 이런 방식으로 등장하는가? 여러분은 시도해볼 수는 있어도 어떤 음을 낼 것인지는 상상할 수 없다. 한 악절이 다른 악절로 이어지는 것처럼 각 모티프들은 앞의 것을 뒤따르며 곡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윈래의 음악적 의도가 표현된다.
 만약 당신이 한 곡을 연구하려고 한다면 작곡가가 그 곡을 쓸 동안의 느낌까지 그 과정에 포함시켜야만 할 것이다. 즉 그 작품의 작곡가가 되어서, 그것이 당신의 곡이 되어야만 한다. 나는 그맇게 생각힌다. 내가 모차르트 협주곡을 연주할 때는 그 곡은 모차르트의 작품이면서 동시에 나의 것도 된다. 나는 모차르트와 그 곡을 나뉘어 가지며 그의 의도를 뒷받침하고 해석한다.
 물론 오늘날에는 모든 연주자들이 다 이런 방식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젊은 음악가들은 테크닉이 좋아서 모차르트 협주곡을 두 번 연습해 보고는 공연하기도 한다. 그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음악을 창조 해내는 방법이 아니다. 그 곡과 호흡을 같이 해야 하며 베베른이 그랬던 것처럼 각각의 음들을 조사해보고 그것이 지닌 의미를 느껴야 한다.
 단순히 악보를 보고 하는 연주가 아닌 악보를 읽고 당신이 다시 재창조해서 음악이 당신 몸을 통해서 나오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나무를 보이는 그대로 사진처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상상 속에서 나무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그리는 인상주의 그림과 같은 것이다. 나는 이 방법이야말로 진정한 ‘살아 있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누군가 인터뷰 도중에 물었다.
 “초기의 당신 연주와 현재의 연주 스타의 차이점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스타일은 디자이너들에게나 있는 것이지요 음악가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
 요아힘은 자신의 방식대로 연주했다. 그러자 그에게 배운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들은 그의 방식대로 연주했다. 그리고 나서 독특한 개성을 지닌 비에니아프스키가 나왔고 이어서 하이페츠가 등장했다. 한동안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들은 하이페츠적인 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그 다음에는 크라이슬러였다. 이런 식으로 상황이 계속되었다. 연주 양식은 자신이 느끼는 강렬한 음악적 느낌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연주자의 몫이다. 그러나 개성이 강한 연주 양식은 특히 젊은 음악가들에게는 위험한 함정이 될 수도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종종 모방하기 쉽기 때문이다.
 본론에서 벗어나 너무 내 생각에 치우친 듯하다. 나는 베베른의 음악 해석 방법에 매우 강렬하게 매료되었다. 물론 그것은 바르셀로나의 경우처럼 실패할 위험부담이 있기는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그는 런던에서는 성공했다. 나는 그 방식을 믿으며 오늘날 우리의 음악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송인경 역)


루이스 크라스너
크라스너는 1903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다섯 살때 미국으로 이주했다.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공부했으며 유럽과 미국에서 독주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후 1944년부터 1949년 시라쿠세로 이주할 때까지 미트로풀로스가 지휘하는 미네아폴리스 심포니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 있었다. 그곳에서 시라쿠세 심포니의 연주여행에 참여했으며 지방의 실내악 에호가 모임을 조직했다. 1972년까지 대학에서 바이올린과 실내악을 가르쳤다. 1976년 이후로 뉴잉글랜드 음악원과 탱글우드에 있는 버크서 음악센터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작곡을 의뢰해서 초연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잘 알려졌으며 또한 베르크의 협 주곡을 최초로 녹옹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쇤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해서 녹음하기도 했다. 광범위한 분야의 현대음악에 관계했으며 그밖에 그가 초연한 현대 음악 작품으로는 카세라와 세션의 곡, 그리고 코웰과 해리스의 소픔들이 있다. 코웰과 헤리스에게는 바이올리니스트 자신이 직접 작곡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의 음반목록에는 작곡가가 직접 피아노 반주를 맡았던 피스턴의 소나타와 미트로풀로스가 지휘하는 쇤베르크 세레나데의 바이을린 파트가 포함되어 있다.

(주1)
크라스너는 스웨덴 방송국에서 녹음한 이 공연을 매우 인상적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로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우연한 기회에 녹음하게 된 음반이었다. 1970년대 초 그 가 스위스 크란의 아메리칸 페스티벌에서 강의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느날 한 신사가 그를 찾아와서는 혹시 스톡홀름에서 베르크 협주곡을 연주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가 그렇다고 하자 그 신사는 자신은 스톡홀름 필하모닉에서 왔으며 오케스트라의 50주년 기념일을 축하하는 음반을 위해 크라스너가 연주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음반의 프로그램에는 브부노 발터와 프리츠 부슈를 비롯한 음악가들의 공연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크라스너는 베르크 협주곡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음반은 오케스트라의 후윈자들만을 위한 제한적인 성격의 음반이었다. 이어서 크라스너의 뉴잉글랜드 음악원 동료인 군트리어 슐러가 베르크 협주곡의 재발매권을 얻어내 1984년 출반했다. 이 음반에는 1954년에 있었던 크라스너와 미트로풀로스의 쇤베르크 협주곡 연도 포함되어 있다. 이 음반 (GM 2006)은 아직도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다.

 

Posted by javaop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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